"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는 그 뜻을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그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늘 들어
이제껏 저를 애타게 하는 비유 중 하나이고 그래서
그 비유의 뜻을 꼭 그리고 다 깨닫고 싶은 비유입니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30분 이상 묵상을 하였지만
그 뜻을 다 깨달았다는 느낌은 여전히 들지 않고
그래서 고독과 고립의 관점에서만 이 비유를 톺아봤습니다.
저의 인식 안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고독은 살되 고립은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독은 적극적으로 살아야 하고,
고독 중에서도 상대적인 고독이 아니라
절대적인 고독을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제게 있습니다.
무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라는 숫타니파타 경전의 경구처럼
우리가 절대 고독을 살 수 있으면 상대적인 고독을 우리는
초월할 수 있고 그래서 어떤 경우든 홀로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없고,
사랑이 있고 없고,
고통이 있고 없고,
칭찬이 있고 없고,
재물이 있고 없고,
권력이 있고 없고에 매이지 않고 그런 것에 좌우되지 않고 홀로 갈 수 있는데
이럴 수 있는 것이 절대 고독이고 그 반대가 상대적인 고독이겠습니다.
물론 숫타니파타에는 절대 고독이니 상대적인 고독이니 그런 표현은 없습니다.
그래서 참고하시라고 숫타니파타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라!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불교의 답은 역시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되는 방식입니다.
부처란 사람이 옆에 있건 없건 인간은 본래 혼자라는
그 절대 고독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이것을 깨달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겐 사람이 많은데 내게는 없는 상대적인 고독을,
젊었을 때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없는 상대적인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래서 좌우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지요.
고독이 두려워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고통이 두려워 사람을 피하지 않지요.
그러니 부처가 되지 못한 사람 곧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 반대로
고독이 두려워 사람에 매이면서도
고통이 두려워 사람을 피하는 단절과 고립의 삶을 살게 되겠지요.
이것이 불교의 방식이라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방식입니다.
불교가 하느님처럼 되는 방식이라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방식이라는 얘기입니다.
하느님만 계시면 누구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누구에게 의존하지도 않을 수 있고,
하느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통도 두렵지 않고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으며,
하느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느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그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인데 나는?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