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오늘의 창세기는 역사의 한 변화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며,
성읍을 세우고 탑을 세우게 됩니다.
날것을 먹으며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인 삶을 살다가 차츰
요리된 것을 먹으며 인공적이고 문화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였습니까?
아마 떠돌며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이런 변화가 가능케 되었다고 오늘의 창세기는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광활한 자연 가운데 한 점에 불과하던 인간이
한 데 모여 자기들의 세계인 성읍을 세우고,
힘을 모아 탑을 세웁니다.
하느님께서 자연을 통해 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 누리던 인간이
이제는 그것을 가지고 뭔가 꼼지락거려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냅니다.
마치 날것에 인간이 무언가를 가미를 하여 요리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퍼지고 발전하여 음식 문화가 되듯
인간은 하느님이 자연을 통해 주신 것을 가지고
거기에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더하여
자기 업적을 이루고 갖가지 문화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뽐냅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탑이고 바벨탑의 정신입니다.
인간의 문화에는 이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문화가 발달한 것이 꼭 좋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경우 저는 퇴폐문화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화 그 자체에서 위험성을 봅니다.
오늘의 창세기는 이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세기가 경고하는 위험성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는 탑을 하늘 닿도록 세우려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자기의 업적을 하느님의 업적만큼 높이 쌓으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쌓아서 자기의 이름을 날리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닿으려는 것은 하늘과 소통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닿아있는 자신을 뽐내려는 것입니다.
교만이란 것이 항상 이러합니다.
하느님께는 도전이요
인간에게는 우월적인 위치에 대한 과시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이라고 함으로써 하느님께 도전하고,
유전자 조작이나 줄기세포 연구처럼 새로운 것을 만든다면서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교란하고 파괴하는 도전을 합니다.
이 도전으로 인간은 하느님과 단절이 됩니다.
교만은 또한 이웃과도 단절케 합니다.
교만은 지독한 자기집중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기에
자기로부터의 발설만 있지 남으로부터의 들음은 없습니다.
일방통행의 주장과 요구, 위로부터의 명령만 있지
수평적인 진실한 소통은 없습니다.
이웃과의 단절에 있어서 영적인 교만은 더 문제입니다.
아마데오 첸치니가 지은 “얼마나 좋은가 한 데 모여 사는 것”은
이에 대해서 잘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하늘 닿도록 바벨탑을 쌓는 것을 이 책에서는
하느님과 소통하겠다고 위로만 치닫는 인간의 행위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직적으로만 소통하려 함이
수평적으로 소통을 불가능케 한다는 것을 이 책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성당에 가서 기도, 곧 하느님과의 대화는 많이 하는데
성당을 나와 이웃과는 도무지 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단적인 예지요.
교만 아니라, 겸손의 영으로 대화를 하였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아마 하느님과 대화하면서도 듣지는 않고 지 얘기만 하고
인간과는 더더욱 듣지 않고 지 얘기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오늘의 창세기는 역사의 한 변화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며,
성읍을 세우고 탑을 세우게 됩니다.
날것을 먹으며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인 삶을 살다가 차츰
요리된 것을 먹으며 인공적이고 문화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였습니까?
아마 떠돌며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이런 변화가 가능케 되었다고 오늘의 창세기는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광활한 자연 가운데 한 점에 불과하던 인간이
한 데 모여 자기들의 세계인 성읍을 세우고,
힘을 모아 탑을 세웁니다.
하느님께서 자연을 통해 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 누리던 인간이
이제는 그것을 가지고 뭔가 꼼지락거려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냅니다.
마치 날것에 인간이 무언가를 가미를 하여 요리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퍼지고 발전하여 음식 문화가 되듯
인간은 하느님이 자연을 통해 주신 것을 가지고
거기에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더하여
자기 업적을 이루고 갖가지 문화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뽐냅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탑이고 바벨탑의 정신입니다.
인간의 문화에는 이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문화가 발달한 것이 꼭 좋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경우 저는 퇴폐문화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화 그 자체에서 위험성을 봅니다.
오늘의 창세기는 이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세기가 경고하는 위험성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는 탑을 하늘 닿도록 세우려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자기의 업적을 하느님의 업적만큼 높이 쌓으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쌓아서 자기의 이름을 날리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닿으려는 것은 하늘과 소통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닿아있는 자신을 뽐내려는 것입니다.
교만이란 것이 항상 이러합니다.
하느님께는 도전이요
인간에게는 우월적인 위치에 대한 과시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이라고 함으로써 하느님께 도전하고,
유전자 조작이나 줄기세포 연구처럼 새로운 것을 만든다면서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교란하고 파괴하는 도전을 합니다.
이 도전으로 인간은 하느님과 단절이 됩니다.
교만은 또한 이웃과도 단절케 합니다.
교만은 지독한 자기집중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기에
자기로부터의 발설만 있지 남으로부터의 들음은 없습니다.
일방통행의 주장과 요구, 위로부터의 명령만 있지
수평적인 진실한 소통은 없습니다.
이웃과의 단절에 있어서 영적인 교만은 더 문제입니다.
아마데오 첸치니가 지은 “얼마나 좋은가 한 데 모여 사는 것”은
이에 대해서 잘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하늘 닿도록 바벨탑을 쌓는 것을 이 책에서는
하느님과 소통하겠다고 위로만 치닫는 인간의 행위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직적으로만 소통하려 함이
수평적으로 소통을 불가능케 한다는 것을 이 책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성당에 가서 기도, 곧 하느님과의 대화는 많이 하는데
성당을 나와 이웃과는 도무지 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단적인 예지요.
교만 아니라, 겸손의 영으로 대화를 하였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아마 하느님과 대화하면서도 듣지는 않고 지 얘기만 하고
인간과는 더더욱 듣지 않고 지 얘기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웃을 사랑 하는 것이 기도라 생각하며
열심히 듣고 사랑 해야 겠습니다.
바벨탑사건은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 동기가 불순할
때는 반드시 하느님의 경고가 있음을
잊지 말라는 교훈으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말하면
현실이 어디 그러냐고,
상대가 들이댈 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인생을 길게 보라고 말하지만,
실은 솔직히 말하면 그 말은 제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을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는 제 마음을 저도
어쩌지 못하는 제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거든요.
고맙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적당히 단절하고
살아가는 신앙생활 좀더 주위를 돌아보는
시간을 깆도록 노력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