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믿음으로써 깨닫게 되는 것인가,
깨달음으로써 믿게 되는 것인가?
하느님을 믿음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분이 존재하는지부터 시작하여 존재를 믿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감각되어지는 존재는
존재여부와 존재자체를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U.F.O 또는 외계인의 존재와 같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도 그것이 결코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라고 긍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믿음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고,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을 믿고,
하느님이 선이사라는 것을 믿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기까지는
깨달음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존재는 믿지만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전부를 또는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수없이 많은 악을 보면서
하느님이 선이시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는데
어느 날 하느님은 선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난 다음 믿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선이시라는 믿음은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선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되었지만
얼마나 좋으신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다 얼마나 좋으신지를 경험하고 나서 얼마나 좋으신지,
다시 말해서 선의 경계와 한량없음을 깨달아 알고
그런 하느님을 믿습니다.
너희는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으라는
시편 34편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런 좋으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과 깨달음과 믿음은 이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깨달음과 믿음으로 이어지고 확대됩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믿을 뿐 아니라
나쁜 것을 주시는 하느님도 사랑이심을 깨닫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그리고 확고하게 믿게 됩니다.
이처럼 깨달음은 나를 깨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나를 깨고 다다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깨트리고 어디에 다다르는 것이고
지금까지 내가 믿고 있는 것을 깨트리고 어디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나이지만 깨닫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어떤 때는 사랑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어떤 때는 더 큰 사랑인 매를 통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유한한 작은 것을 보고 무한한 존재를 믿고,
지금 있는 어떤 것을 보고 지금 없는 미래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무한과 가능성에 자신을 여는 사람에게
깨달음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가 얘기하는 “믿음으로써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는 말도 맞습니다.
믿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더 많은 깨달음을 주시고,
깨닫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믿게 되는
선순환이 신앙인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믿음으로써 깨닫게 되는 것인가,
깨달음으로써 믿게 되는 것인가?
하느님을 믿음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분이 존재하는지부터 시작하여 존재를 믿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감각되어지는 존재는
존재여부와 존재자체를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U.F.O 또는 외계인의 존재와 같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도 그것이 결코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라고 긍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믿음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고,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을 믿고,
하느님이 선이사라는 것을 믿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기까지는
깨달음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존재는 믿지만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전부를 또는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수없이 많은 악을 보면서
하느님이 선이시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는데
어느 날 하느님은 선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난 다음 믿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선이시라는 믿음은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선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되었지만
얼마나 좋으신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다 얼마나 좋으신지를 경험하고 나서 얼마나 좋으신지,
다시 말해서 선의 경계와 한량없음을 깨달아 알고
그런 하느님을 믿습니다.
너희는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으라는
시편 34편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런 좋으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과 깨달음과 믿음은 이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깨달음과 믿음으로 이어지고 확대됩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믿을 뿐 아니라
나쁜 것을 주시는 하느님도 사랑이심을 깨닫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그리고 확고하게 믿게 됩니다.
이처럼 깨달음은 나를 깨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나를 깨고 다다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깨트리고 어디에 다다르는 것이고
지금까지 내가 믿고 있는 것을 깨트리고 어디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나이지만 깨닫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어떤 때는 사랑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어떤 때는 더 큰 사랑인 매를 통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유한한 작은 것을 보고 무한한 존재를 믿고,
지금 있는 어떤 것을 보고 지금 없는 미래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무한과 가능성에 자신을 여는 사람에게
깨달음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가 얘기하는 “믿음으로써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는 말도 맞습니다.
믿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더 많은 깨달음을 주시고,
깨닫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믿게 되는
선순환이 신앙인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아직 겨자 씨 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보이는 모든것이
하느님께로 부터 나왔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영아를 성폭력하고 살해한 김길태가
현실에 존재하듯이 자신을 길에 버린 아버지를
떠올리는 이가 어떻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아버지를 자비로운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까?
“사랑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유한한 작은 것을 보고
무한한 존재를 믿고,
지금 있는 어떤 것을 보고
지금 없는 미래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듯이“
상처받고 우울해 하는 그에게 다가가는
나의 작은 사랑의 몸짓을 통해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게 하는 열정이
무엇보다 아쉬운 현실에서 작은 사랑이 될 것을 이아침에 다짐해 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