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일반 손님을 대상으로 하는 여기 국밥집과
특별히 예약하신 분들이 미사도 드리고 저와 식사도 같이하는 여기 밥상도 하지요.
그런데 지난주와 어제 여기 밥상을 하면서 특별한 체험을 했습니다.
지난주에도 여기 밥상을 했는데 코로나로 대면 만남을 못한 분들이 만나서 그런지
그분들끼리 너무나 신나게 얘기를 하시는 거였고 그래서 식사 내내
저는 그분들 얘기에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도 식사를 하는데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주에는 열여덟 분이나 식사를 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어제는 일곱 분뿐이었는데도 마찬가지여서 그것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하느님도 이렇게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실 때가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데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듯
우리끼리만 대화를 재밌게 나누면 그때는 하느님도 어쩔 수 없으시겠지요?
그런데 그런 경우가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이 안 계시는 것 말입니다.
너무 맛있어서 먹는 데 열중하다 보면 식탁에 주님이 안 계시고,
오래간만에 실컷 수다를 떨고 나니 속은 시원한데 그 대화에 주님이 안 계시고,
오랫동안 힘들게 해오던 일을 마침내 끝내고 나니 그 성취감으로 인한 기쁨이
대단하기는 한데 그 기쁨에 주님이 안 계십니다.
그래서 어제 기쁨을 낳는 생산적인 근심과 주님을 만나는 신앙적인 근심을 봤듯이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어떤 기쁨이어야 하는지 성찰해야겠습니다.
기쁨에는 자기 성취적인 기쁨이 있지요.
대학에 들어가고, 시험에 붙고,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등의 기쁨 말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한 차원 높은 기쁨으로서 깨달음의 기쁨도 있습니다.
이런 기쁨도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좋은 것이지만
우리의 기쁨은 오늘 주님께서 예를 드셨듯이
아이를 낳는 기쁨처럼 인격적인 기쁨이면 더 좋을 것이고,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낳는 기쁨이면 더욱더 좋을 것이며,
그래야 우리는 신앙적이고 그 기쁨은 영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기쁨만 그런 것이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어제 봤듯이 근심도 그런 것이어야 하고,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처럼 두려움도 그런 것이어야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두려움이 없을 것 같은 바오로 사도도 두려움이 있었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나 봅니다.
이에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 이유가 바로
당신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오로 사도의 두려움은 주님께서 아니 계시는 두려움이었고,
사실 우리의 많은 두려움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 계시는 두려움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두려웠던 것은 코린토 사람들이 아니라
코린토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이었듯이
우리의 많은 두려움은 하느님이 아니 계신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느님 없이 먹고 마시고,
하느님 없이 대화하고 친교나누고,
하느님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하느님 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나는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 할 수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