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지혜를 받드는 이들은 거룩하신 분을 섬기고,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반대로 어리석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집회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주님께서 사랑하신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자기 딴에는 지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어리석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한다고 오늘 집회서는 얘기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죽음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죽는 길인 줄 모르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남을 죽여야 자기 산다는 생각하는 것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모르고
죽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지금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모르고
죽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죄가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모르고
죄를 사랑하여 죽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약삭빠름을 지혜로운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하여 요령이 많은 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처세술이 뛰어난 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줄을 잘 서는 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 등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서 바보가 되는 것은
당연히 어리석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참 지혜를 모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보다 영원히 행복한 것이
더 좋은 것임을 아는 것이 참 지혜임을 모르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참 지혜이신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구약의 지혜 문학에서 지혜는 단순히 덕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지혜이시고
하느님께서 지혜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집회서에서도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고 인격적으로 얘기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입니다.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여왕이신 지혜여”라고 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는 “당신은 지혜이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모를 때 덕으로서의 지혜는 사랑하지만
하느님이신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숱하게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지혜를 인격적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이 아는 것이요,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엄청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어야 할 것입니다.
지혜를 받드는 이들은 거룩하신 분을 섬기고,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반대로 어리석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집회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주님께서 사랑하신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자기 딴에는 지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어리석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한다고 오늘 집회서는 얘기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죽음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죽는 길인 줄 모르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남을 죽여야 자기 산다는 생각하는 것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모르고
죽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지금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모르고
죽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죄가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모르고
죄를 사랑하여 죽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약삭빠름을 지혜로운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하여 요령이 많은 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처세술이 뛰어난 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줄을 잘 서는 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 등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서 바보가 되는 것은
당연히 어리석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참 지혜를 모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보다 영원히 행복한 것이
더 좋은 것임을 아는 것이 참 지혜임을 모르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참 지혜이신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구약의 지혜 문학에서 지혜는 단순히 덕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지혜이시고
하느님께서 지혜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집회서에서도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고 인격적으로 얘기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입니다.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여왕이신 지혜여”라고 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는 “당신은 지혜이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모를 때 덕으로서의 지혜는 사랑하지만
하느님이신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숱하게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지혜를 인격적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이 아는 것이요,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엄청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어야 할 것입니다.
늘 순간 순간이 기쁘고 행복 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