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부터 발산되는 선으로부터 창조된 실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이다.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기원이 거기에 있다. 자신에게 선물로 다가오는 실재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관계의 기초다. 그러므로 주어진 현실과 실재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기쁨을 누릴 수 있어도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결과라고 하거나 선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기쁨을 누릴 수 없다. 우리가 은총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무상으로 받은 것이기에 선물이다. 자신의 노력과 수고의 결과라고 하거나 자기 힘으로 성취한 결과라고 하는 사람은 사용하기 위하여, 이용하기 위하여, 소유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을 대상화함으로써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의 관계는 무너져버리고 단절로 인한 고립으로 스스로 갇혀버리게 된다. 사물을 그 자체로써 향유하기보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보상을 염두에 둔 목적은 되돌려 받기를 원한다. 그러한 욕구가 생기자마자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뒤로 물러나게 되고 자신의 욕구만 앞에 나타나게 된다. 사용성과 기능성에 이용할 가치가 있을 때만 움직이는 건 신앙의 삶이 아니다. 순수한 사랑의 행위는 그 자체가 보상이며 아무것도 되돌려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규칙을 잘 지키고 기도와 희생을 많이 바쳐서 얻은 결과라고 하는 것들은 신앙의 핵심을 비켜 갈 때가 많다. 왜냐하면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창조와 돌보심을 자신의 공로와 연결함으로써 하느님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공로와 업적에 따라서 하느님이 자동으로 개입하는 결과로 만드는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이라는 논리를 하느님께 적용함으로써 구원을 마치 인간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무한한 본성을 반영하는 삼위일체의 위격적 사랑은 우리의 사랑을 비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완전한 자기 비움이라는 무상의 증여가 주는 기쁨 안에서 깊은 만족을 누리는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이러한 친교의 경험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내어주는 기쁨과 받아들이는 기쁨으로 서로에게 생명을 준다. 천국에 대한 실재를 오감을 통해 맛보고 만지는 것이며, 우리의 삶 전체가 고요하고 침착하면서 동시에 열렬하게 움직여지는 것이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과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기까지 부담이 없다. 순수한 사랑은 무게의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이 언제나 선물로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받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속에서 기쁨이 나온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세상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만이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사랑의 관계로 이끌어주는 감사하는 마음이 불러내는 응답이 너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놓아주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난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응답하는 사랑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기 쉽게 만든다. 자신은 사랑하지도 않고 변화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받기만 좋아하고 내어줄 줄 모르는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관계가 어렵다. 또한 주는 것은 좋아하지만 받을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둘 다 반쪽짜리 사랑이다. 사랑은 선물로 주어진 행복이며 기쁨이다.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사랑,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