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께서는 정해진 날수와 시간을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은 주님의 다섯 가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 그분께서는 여섯 번째로 그들에게 지성을 나누어 주시고,
일곱 번째로 그분의 능력들을 해석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
그분께서는 분별력과 혀와 눈을 주시고,
귀와 마음을 주시어 깨닫게 하셨다.”
오늘의 말씀은 주님께서 온갖 것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하느님께서 주시고,
하느님께서 해주셨다고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셨다고 할 때 우리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시는 분은 하느님임을 강조하는 차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지
다른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부모가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는 얘기고,
나의 형제나 친구도 인간에 의해 맺어진 인연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얘기고,
능력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누가 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다른 누구에게 감사하거나 원망할 것 아니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비하할 것도 아니며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원망할 일이 있어도 하느님을 원망하면 됩니다.
자신은 더더욱 비하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는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차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넘치도록 주시고,
조건 없이 주시고,
주시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실 정도 기꺼이 주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 주신다고 느끼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고,
만일 그렇게 느낀다면 하느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인지, 불감증 때문인지
은총을 주셔도 느끼지 못하는 나의 문제이고,
사랑을 주셔도 느끼지 못하는 나의 문제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받아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차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을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 선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선 나에게 존재를 주셨고 나라는 존재를 주셨습니다.
한 때는 왜 나에게 존재를 주셨는지,
왜 이런 나를 주셨는지 원망하고 투덜댔지만
이제는 이런 나라는 존재를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하느님은 또한 나에게 지금의 부모, 형제, 이웃을 주셨습니다.
나의 능력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나의 언변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나의 성격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심지어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하느님께서 다 주신 겁니다.
물론 나의 탓 또는 네 탓으로 슬픔과 괴로움이 오고,
내가 잘해서 또는 네 덕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오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비록 그것들이 악으로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궁극적인 선으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다섯 가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 그분께서는 여섯 번째로 그들에게 지성을 나누어 주시고,
일곱 번째로 그분의 능력들을 해석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
그분께서는 분별력과 혀와 눈을 주시고,
귀와 마음을 주시어 깨닫게 하셨다.”
오늘의 말씀은 주님께서 온갖 것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하느님께서 주시고,
하느님께서 해주셨다고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셨다고 할 때 우리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시는 분은 하느님임을 강조하는 차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지
다른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부모가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는 얘기고,
나의 형제나 친구도 인간에 의해 맺어진 인연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얘기고,
능력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누가 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다른 누구에게 감사하거나 원망할 것 아니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비하할 것도 아니며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원망할 일이 있어도 하느님을 원망하면 됩니다.
자신은 더더욱 비하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는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차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넘치도록 주시고,
조건 없이 주시고,
주시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실 정도 기꺼이 주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 주신다고 느끼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고,
만일 그렇게 느낀다면 하느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인지, 불감증 때문인지
은총을 주셔도 느끼지 못하는 나의 문제이고,
사랑을 주셔도 느끼지 못하는 나의 문제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받아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차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을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 선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선 나에게 존재를 주셨고 나라는 존재를 주셨습니다.
한 때는 왜 나에게 존재를 주셨는지,
왜 이런 나를 주셨는지 원망하고 투덜댔지만
이제는 이런 나라는 존재를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하느님은 또한 나에게 지금의 부모, 형제, 이웃을 주셨습니다.
나의 능력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나의 언변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나의 성격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심지어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하느님께서 다 주신 겁니다.
물론 나의 탓 또는 네 탓으로 슬픔과 괴로움이 오고,
내가 잘해서 또는 네 덕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오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비록 그것들이 악으로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궁극적인 선으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