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숨, (성령강림 대축일 묵상-창조와 재창조)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창세 2,7)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요한 20,19)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21
“예수께서는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용서는 너와 나의 관계에 하느님의 숨을 불어넣는 행동하는 자비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평화를 누리게 하여 자만심으로 단절된 너와 나의 관계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재창조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숨이 진흙으로 빚은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준 것처럼
용서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탐욕이 빚어낸 독점과 소유가 만든
극단적 단절이라는 죽음의 관계에 다시 하느님의 숨을 불어 넣어 줌으로써
생명을 다시 찾아 평화 속에서 숨을 쉬게 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이다. 숨과 평화와 용서는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숨이 진흙이라는 원초적 진실과 만나게 함으로써
살아 숨 쉬게 한다는 것이다.
존재의 원천으로 돌아가 흙으로 빚은 인간이라는 진실과 만나게 하고
하느님과 연결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숨이다.
인간은 이로써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기원을 잊어버리고 꼭대기를 점령하려는 인간의 어떠한 시도도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만다는 사실을 경험하였다.
인간은 이러한 단절의 역사 속에서 힘의 논리로 지배를 꿈꾸어 왔으며
끊임없이 반복을 되풀이하면서 평화를 잃어버렸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폭력은 인간의 과도한 탐욕에서 시작되었으며
독점과 지배의 수단으로 인간이 이용되면서 만든 참상이다.
너와 나의 단절된 관계가 공동체와 국가를 넘어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평화는 용서의 산물이다.
용서는 자신의 기원이 흙으로 빚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하느님의 숨을 너에게 불어 넣어 단절되었던 관계에 하느님의 자비가 흐르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최선의 것이 타락하면 최악이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자유가 점령과 지배라는 과도한 탐욕을 불러내는 자기중심적 가치에 기반을 둘 때
최악의 결과인 단절과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숨은 성령 안에서 생명을 주는 바람으로 불어온다.
삼위일체 하느님 자비의 샘에서 흘러나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 각각의 개체로 흘러간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가 그분의 손에 들려 있지 않으면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자신으로 가득 차서 그분이 숨 쉬실 자리가 없고
영의 현존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힘의 논리로 무장하여 지배와 자아도취의 우월감으로 가득 차서
주님의 영이 들어올 여백이 없는 것이다.
위로부터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적 진실을 외면하고
말씀과 영의 통치를 벗어나 독점과 소유와 지배로 지옥이라고 부르는 나라를 만든다.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눈앞의 이익과 쾌락과 편안함이라는 우상에 빠진 사람이다.
이런 우상에 빠진 사람은 하느님의 숨을 가로막는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은 이용의 대상일 뿐이다.
이용 가치가 떨어지거나 없어지면 버려지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관계에 치명상을 입히고,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타인의 자유를 헤치면서 저지르는 무수한 폭력의 현장이 우리 눈앞에 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억압하고
전쟁과 폭력과 사기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부추기고 있다.
하느님의 숨을 잃어버린 인간은 진흙으로 남아 있는 죽은 사람이다.
너와 나 사이에 하느님의 숨을 불어넣는 용서가 자리 잡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새 창조의 질서는 관계 안에 하느님의 숨을 받아들일 여백을 만들어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의 자유를 하느님의 손에 내어드림으로써 시작된다.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의 동등함을 포기하고 사람이 되시어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가난하심과 겸손하심을 배우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숨을 너와 나의 관계 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용서는 하느님의 숨으로 관계를 재창조하는 일이다.
사람을 살리는 용서가 없이 평화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생명을 되찾게 해주는 하느님 숨.
예수께서는 자신의 자유를 내어놓는 죽음으로써 용서가 최종적인 말이 되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