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성 (하느님의 베푸심)
나는 인생 후반부에 들어서 비로소 내 신앙의 근본적인 변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찾았다. 사람이 되신 예수로 말미암아 그분을 따르기 위해 불필요한 교리와 신학적 해석과 전통이라는 틀을 벗어나 복음에서 발견한 예수님의 마음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프란치스코의 영성과 삶으로 드러난 생활방식의 도움을 받아 그분이 말씀하시고 실천하셨던 삶의 모범은 내가 살아가야 할 거울과 이정표가 되었다.
현세의 삶과 세상, 그리고 하느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면서 함께 하신다는 깨달음은 과거와 미래의 중간을 사는 현재 안에서 발견하는 하느님 나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현존하는 세상 만물의 생생한 기원을 관계 속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이라는 관계가 무상으로 베푸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무상성에 기초를 두고 다시 시작하면서 의미와 가치와 인식의 변화가 조금씩 일어났다. 깨닫고 깨어나 깨어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구원이라고 부르는 실재를 알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영은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닌 한계가 우리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용서와 화해를 위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시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그러한 노력 속에서 인류 역사 안에 살아계시며 개입하신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이 움직이고 변할 때 하느님의 베푸심을 경험한다는 말이다. 구원은 인간 노력의 산물인 업적과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삶 밖에서 위로나 보상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살아 숨 쉬는 동안 하느님의 무상성은 우리의 삶 안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에 받게 될 처벌과 보상이라는 틀은 힘을 잃는다. 인간의 삶 밖에서 얻는 무상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은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죄책감만 주었다. 잘 지키면 상 받고 못 지키면 벌 받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자유롭지 못한 노예처럼 계명 준수의 반복이라는 폐쇄된 삶을 만들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율법 위에 무상성이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분은 우리의 윤리적, 율법적, 올바름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세리들과 창녀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마태 21,31)
예수님께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메시아가 되기를 거부하신 것은, 하느님의 무상성과 상징성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이 베푸시기에 인간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은 우리가 베푸는 우리의 실천이 없으면 사라지고 만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다면, 우리 삶의 변화다. 우리는 하느님의 무상성 안에서 태어났고 성장하였다. 신앙은 결단이다. 무상성을 기초로 하여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이 신앙이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끝까지 자신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처럼 신적 변화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신다.
잃었던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루가 15,24)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고 기뻐해야 할 일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셨다. 사람들은 베풀어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기뻐한다. 우리의 삶도 베풀어진 것이기에 그것을 내어주고 쏟아서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기쁘게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베푸심과 용서가 관계 속에 흐르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서 바리사이는 율법을 잘 지킨 자기의 행위밖에 보지 못했지만 세리는 하느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빌면서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과 믿음만이 자유를 준다. 하느님의 함께 계심을 잃어버린 사람은 돈과 혈연과 권력의 노예로 살아갈 뿐이다. 그것들을 이용하여 지배와 우월감의 영역을 넓히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것이든 우월감은 자신을 소외시킬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도 성령도 외면하게 한다.
우리의 자유는 구원받아야 한다. 우월감과 자만심을 부추기는데 자유를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나를 지배하도록 자유를 사용할 때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한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21,31)
은총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하고 진리는 그 베푸심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서 드러난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역사 안에서 베푸심이라는 주제는 은폐되고 인과응보의 틀과 논리를 하느님께 적용하면서 바치는 것에 구원이 있다는 논리가 발생하였다. 바친 만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베푸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무상으로 베푸신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고는 우리의 실존도 설명되지 않는다. 인과응보의 사상을 청산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우리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만다. “나병환자 열 사람”(루가 17,11-19)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베푸심에 대한 감사에서 신앙체험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게 내어주고 쏟아서 돌보아주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베푸심과 용서가 실천되는 관계에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 있고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는 기쁨이 있다. 기쁨이 발생하는 복음이 전해지면서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관계 속에 흘러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와 피조물 안에서 확산하는 선이 기쁨으로 드러나게 되고 그 기쁨이 서로를 비추는 것이다. 내어주는 기쁨과 쏟아내는 기쁨, 피 흘리는 기쁨으로 생명까지 내어주시는 기쁨이 십자가의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기쁨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와서 배워라. 내가 주는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9) 주고 또 주어도 주고 싶은 헌신에의 조바심, 푸근한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
하느님의 무상성을 받아들이려면 믿음이 요구된다. 인과응보의 틀에 묶여 살아왔기 때문에, 틀을 버릴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고 모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죽기를 각오하면 생명을 얻을 수 있듯이 우리가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으며,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다시 얻을 수 있다. 그것이 죽음 다음에 오는 부활의 삶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