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실재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내가 통제하지 않을 때 그분께서 내 안에서 그 일을 하신다.
은총은 그렇게 내가 사라진 곳에서 이루어지는 영의 활동으로 나를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나를 찾다가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다가 나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얻는 은총이다.
내 생각과 선입견과 꿈을 재구성하시는 분께서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하느님 나라를 현재로 바꾸신다.
은총과 치유는 그렇게 은밀하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기도하거나 기도를 받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기도에만 의존하는 이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의 활동을 가로막는 주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꼭대기를 차지하기 위하여 밀어붙이고, 주장하고,
사랑하고 존중하기보다 사물을 사용하듯이 사람과 하느님을 사용하고,
자신을 더 크게 확장하려고, 반응을 조작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통치가 아니라 내가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려고 그렇게 한다.
사랑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저항하는 사람은 없다.
매력은 은총 안에서 꽃피기 때문이다.
성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가 보여준 실재는 끌어당기는 힘에 매료된 삶이었으며
나는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매력에 점점 더 끌려가고 있다.
이것이 나의 실재다.
빛에서 빛을 받아 나에게서 내가 해방되는 나라
가난의 빛에서, 겸손의 빛에서 조명을 받아 단순하지만 해방된 자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기쁨의 이유가 되는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으로 관계를 재구성하는 거기에 은총의 실재가 있다.
변화는 변화된 사람을 만남으로 변화된다.
나는 내 인생 후반부에 이르러 비로소 성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를 만났다.
가난하고 겸손하며 기쁘게 사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아름다운 삶과 만나는 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변화시키고
상상력의 실재가 관계를 변화시킨다.
매력의 실재가 우리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전염과 매력을 통해 안으로부터 전달된다.
복음적 기쁨은 내 얼굴에, 내 눈빛에, 부드럽고 따뜻하게 건네는 내 말투에,
필요성을 채우기 위해 내어 주는 몸과
관계를 회복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흘리는 피에
무상으로 자신을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통제와 힘이 사라진 곳에 피는 꽃,
사랑으로 하느님을 비춰주는 열린 눈,
상상의 세계를 관계의 혁명으로 재창조하는 거기에
은총이라고 부르는 선물의 실재가 있다.
그것은 나의 기도와 희생과 업적과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느님 자비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무상의 선물이다.
나의 수고와 땀으로 이룬 것이라면 은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응답하는 사람의 언어는 감사와 감동이 만들어내는 감격과 감탄이다.
찬미와 찬송과 찬양으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에 대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기쁨의 표현이다.
인간이 가진 최상의 응답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