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김대건 사제의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이 김대건 신부님께 딱 들어맞는 얘기라는 말입니다.
자식과 형제가 부모와 형제를 팔아넘길 거라는 말대로
신부님의 경우 매형이 밀고를 하여 아버지가 순교하고,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으니
가히 복음에 딱 들어맞는 얘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김대건 신부님이 우여곡절 끝에 입국하여
가족의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의연하였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의연함이 젊은 사제에게 있을 수 있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오늘 복음을 들으실 때
다른 사람의 얘기로 듣지 않고 바로 당신 얘기로 들으셨으며
그래서 그런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각오하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연함은 각오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최악을 각오하지 않고 최악의 상황에서 의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각오의 기도와 기대의 기도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제가 여러번 얘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각오와 기대는
미래와 관련한 태도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각오는 악을 각오하고, 기대는 선을 기대하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각오와 기대가 이렇게 차이가 있으니
악을 각오하는 사람과 선을 기대하는 사람의 기도가 다를 것입니다.
선을 기대하는 사람은 앞길에 좋은 일만 있기를 기도하고 그러니
당연히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 좋이 일어나면 크게 실망하며 거기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좋은 뜻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각오하는 사람은 안 좋은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감수하고 끝까지 견딜 힘을 주십사고 기도할 것이고,
실제로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오늘 김대건 신부님처럼 의연할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끝까지 얼마나 의연했는지는 "교우들아 보아라"로 시작되는
마지막 편지나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질 때 하긴 말씀에 잘 드러나는데
오늘만이라도 이 말씀들에 드러난 신부님의 의연함을 우리는 본받아야겠습니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말고 돕고, 아울러 주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제 말을 똑똑히 들어 주십시오.
제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며, 천주교를 믿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