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도 나오는데,
이 두 곳에서는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루카복음의 다른 점은 또 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마르코와 마태오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지만
루카에서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질문자에게 반문하십니다.
루카에서 예수님의 반문에 대한 대답은
마르코와 마태오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답과
똑같습니다.
마치 질문을 한 율법 교사는
그 답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마태오와 루카는
이 질문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계명 이야기만 전하지만
루카는 여기에 이웃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이어지는 질문 역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복음사가는 언급합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받은 질문을 도로 하십니다.
옳게 대답한 율법 교사에게
계명 이야기에서처럼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 교사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정당화일까요?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해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지키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몰라서 못한다기보다는
알면서도 하기 싫은 경우들입니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들면서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핑계가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는 알고 있습니다.
물론 심각한 상황에서는
자신마저도 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그것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율법 교사의 첫 번째 질문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은
결국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막상 해야하는 상황에서는
하기 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계신 듯합니다.
알면서도 질문하는 율법 교사에게
해야한다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무엇이 좋은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길을 보여주실 뿐입니다.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시고,
스스로 결정할 시간을 주십니다.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막상 첫 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나 자신을 재촉하거나 비난하기 보다는
예수님처럼 나 스스로에게도
시간을 주고,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유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