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겠다.’
오늘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며 그날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온다는 그날은 어떤 날입니까?
일제 강점기 심훈은 해방의 날을 기다리며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지었고,
군부 독재 시대에 민주화 운동가들은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날을 고대하며
‘그날이 오면’이라는 민중가요를 불렀는데 오늘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시는 그날은 우리가 기다리는 그런 날입니까?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날은 주님과 우리가 새 계약을 맺는 날인데
새 계약은 그 옛날 모세가 돌판에 계약을 새긴 것과 달리
주님 친히 우리 마음에 당신의 법을 넣어 주고
그래서 우리 마음에 주님 법이 새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말에 부모가 자식에게 또는 스승이 제자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시며
꼭 명심하라고 하는데 그것을 마음에 새기느냐 마느냐는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스승은 명심하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하는 자식과 제자가 있고
그 말씀을 개떡같이 여기는 자식과 제자도 있지요.
그렇기에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법을 명심 곧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 친히 당신 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주신다고 하며 그날이 올 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은 우리 몫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원치도 않는데 주님께서 당신 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신다면
그것은 원치도 않는데 주홍글씨를 새기듯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 마음에 새겨야지 사랑이지
억지로 우리 마음에 새기신다면 그것은 당신의 낙인이지
우리의 사랑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뜻이라면 제게 그날이 온다는 것이 별로 기다려지지 않을 것이고,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당신 법을 새겨주시는 것이 사랑이 되려면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명심하고 싶어도 명심하지 못하는 나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러니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총을 주십사고 청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체했을 때 사관을 트면 쉽게 체기가 내려가는데
제 살을 바늘로 찌르는 것이 두려워 그 쉬운 것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듯 주님께서 마음에 새겨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명심한다는 것도 어쩌면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것일 겁니다.
우리의 사랑이 너무도 뜨거워 하느님의 법이 마음에 새겨지면 제일 좋겠지만
우리가 그러지 못할 때 따끔한 한마디가 필요하듯 따끔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뜨겁지 않을 때 우리는 부드러운 사랑이 아니라
따끔한 사랑을 원하는 염치 정도는 있어야겠지요.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부디 우리가 기다리는 그런 날이기를~
신부님 오랫만 이십니다~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성사 되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