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은 꼭 공정하지는 않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묵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님의 다른 말씀이 생각납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는 말씀 말입니다.
이 말씀은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나 늦게 한 시간밖에 안 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사랑이
악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너그럽고 넓은 하느님 사랑이라고 칭송할 만하지만
선인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오늘 비유에서 일찍부터 일한 일꾼들의 입장에서는
너그러운 사랑이 아니라 불공정한 사랑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께
그것은 불공정하다고 하는 사람을 선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참으로 선인 또는 성인이라면 악인에게도 자비로운 하느님 사랑을 찬양할 겁니다.
우리는 공정한 것을 중요시하고
요즘 젊은이들은 특히 공정을 제일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매우 보수적으로 되어 가난한 사람이나 힘없고 능력 없는 사람도
모두 같이 잘 사는 평등 세상은 별 관심 없고 그저 세상이 공정하기만을 원합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인천 국제공항의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화했을 때
많은 젊은이가 이러한 정부의 처사를 잘한 것이라고 하지 않고 시험 봐서
능력에 따라 들어가는 그런 공정과 어긋난다고 그리고 자기들이 그렇게
고생, 고생하여 들어갈 일자리를 뺏는 것이라며 반대했지요.
그리고 상류층 자녀들이 부모 덕분에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 때문에 분노했지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러니까 상류층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의 능력도 능력인데
대부분 젊은이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공정하지 않고 억울하다고 하니 모순이지요.
제 생각에 똑같이 일했는데도 정규직은 더 받고 비정규직은 덜 받는 것이,
그리고 똑같이 일하는데도 사내 하청 노동자는 덜 받고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이
오늘 복음의 눈에서 볼 때는 더 공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 불의하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오늘 얘기는 자본주의의 정의와 복음의 정의 사이에
그리고 능력주의의 공정과 사랑의 공정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그래서 오늘 일꾼들이 불평하듯 두 기준 사이에는 갈등이 불가피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다른 자식보다 능력이 부족한 못난이라도
똑같이 굶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과 같고,
다른 자식들보다 늦게 일터에 나오는 게으름뱅이라도
늦게라도 일하러 나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비유는 구원의 막차를 타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일찍 세례를 받고 일찍 수도원에 들어온 사람도 있지만
죽기 전에야 세례를 받고, 실컷 잘 놀다가 나이가 꽉 차서 수도원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이 늦게라도 세례받고, 늦게라도 수도원에 들어오는 것을
우리는 시기하거나 억울하게 생각지 말고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세속의 쾌락이나 행복을 기준으로 하면 일찍 세례받고 수도원에 들어오는 것이
늦게 세례받고 수도원 들어오는 것보다 손해 보는 것 같고 억울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기준으로 보면 일찍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이 그렇게 고역입니까?
일찍부터 복음을 사는 것이 불행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그렇게 고역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