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
간땡이가 붓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면, 망령이 단단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임금의 초대를 그리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진정 그들의 임금이었다면 그 신하나 백성이
임금이 초대한 아들의 혼인 잔치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을 우습게 생각한 것이고 아무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비유를 생각하며 우리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성찰했고,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한다면 우선 두려움의 하느님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지혜의 시초라고 했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겸손으로 인해 하느님 두려워할 줄 안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하였는데
큰 시련을 겪음으로 인해 그 교만이 깨어지고 자기의 한계를 체험할 때
비로소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다음의 하느님 체험은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나는 너무도 미천하며,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나는 너무도 죄인이며,
하느님은 지극히 영광스러우시고 나는 너무도 초라합니다.
그러나 이런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런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초대하심을 대단한 영광으로 삼는 겁니다.
그다음의 하느님 체험은 사랑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은 크고 두려우시며, 높고 영광스러운 분이실 뿐 아니라
참으로 자애와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심을 더 나아가 체험하는 겁니다.
아버지 같으신 하느님에 어머니 같으신 하느님 체험까지 하는 거지요.
하느님의 이 사랑을 사랑하는 우리는
하느님이 보고 싶어 달려가고,
그리워서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그다음은 기쁨과 즐거움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이 어머니의 품처럼 그립고, 편할 뿐 아니라
세상 어떤 것보다도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세상 그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분이십니다.
이때의 하느님은 아마 연인과 같은 하느님일 것이고
이때에는 하느님께 기쁘고 즐겁게 나아갈 터인데,
솔직히 저는 이 정도의 하느님 체험은 아직 못했고,
성인들이 그러한 것을 보고 짐작을 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예복을 입지 않음에 대해서도
그 뜻이 무엇일까 짐작을 해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신 것이고
그러니 혼인 잔치에 먼저 초대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이고,
나중에 고을 어귀 길거리에서 초대된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리고 먼저 초대된 이스라엘 백성이건 나중에 초대된 이방인이건
하느님의 구원 잔치에 초대되었다면 그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하는데
그 예복이란 것이 바로 우리의 합당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마음가짐이란
하느님께 대한 합당한 두려움이요,
‘황공무지로소이다!’라고 할 때의 그 마음이요,
어머니에게로 갈 때의 그 그리움과 편안한 마음이요,
연인에게 달려갈 때의 그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