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함과 무력함이 관계를 변화시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서의 이야기 안에서 육화의 현장을 들여다보았다. 말구유 안에 갓 태어난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었다고 루가복음은 전해 준다. 벌거벗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이 연약한 모습이야말로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벌거벗은 아기의 연약함은 상대방이 나에게 영향을 주어 나를 변화시키도록 내어놓는 연약함이다. 하느님의 전능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무력하고 연약하게 죽으셨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힘이 아니라 연약함과 무력한 내가 있다. 철옹성같이 겹겹이 둘러싼 내 자아의 벽들이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무장한 나를 본다. 남이 나를 사랑하기 쉽도록 나를 내어놓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진실한 내면의 상태는 연약하고 무력한 나의 모습이다. 그러한 나를 내어놓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면 나를 내어놓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관계성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이 나에게 영향을 주도록 나의 자유와 의지를 그분의 손에 맡겨드리는 가난함이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여백을 만들고 너를 받아들일 여백을 만든다.
하느님의 가난하심이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면 나의 가난함이 누군가가 나에게 영향을 주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에는 상대방이 들어올 수 있도록 힘을 포기하는 가난과 허용하는 겸손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가난은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이 나에게 영향을 주도록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막는 단절은 죽음을 초래한다. 내가 나를 가두는 감옥이기 때문이다. 그 감옥에서 외로움과 우울함과 실존적 공허를 느끼며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행위 동시적 만족이라는 중독성 있는 대체를 찾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은 악을 저지르게 된다. 연약함과 무력함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저지르는 악이다. 그렇게 되면 폭력과 증오의 칼로 관계를 심각하게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악인 줄도 모를 때가 많다. 죄의식도 없이 합리화와 정당성을 외치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을 찾아 헤맨다. 악의 결집이 사회적 악이 되는 현상이다. 다른 이들로부터 단절될 때 아프고 독해지며 악이 나를 지배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만든 왕국에서 누구로부터도 간섭이나 질문도 받지 않는 힘 있는 주인으로 행세하는 것이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은 죽어도 죽는지 모르는 사랑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과 연결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와서 배워라”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성부로부터 받은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셨다.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의 현장이 성사적 현존으로 드러나는 관계성이다. 우리가 지은 죗값으로만 여기던 예수님의 죽음과 얼마나 대조되는가? 사랑은 사랑에 의해 죽는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영의 신비다. 끝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아버지로부터 흘러나오는 자비와 선의 신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배우는 관계 맺는 방식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에서 나온다. 성령은 곧 아버지의 영이며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시다. 관계성에 숨을 불어넣는 영의 인도를 받아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본질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