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 1 독서와 복음은 모두 자신을 낮추라고 합니다.
그러니 연중 제22주일은 자신을 낮춤이 주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을 낮추라고 하시지만
낮춤이 굴욕이면 억지로 낮추거나 시늉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낮춤이 아니고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낮춤이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낮춤은 어떤 것입니까?
크게 두 가지, 겸손의 낮춤과 사랑의 낮춤입니다.
먼저 겸손의 낮춤을 보겠습니다.
겸손을 좁은 의미로 이해하면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자기 꼬라지를 잘 아는 것입니다.
내가 뭐 대단한 것 같지만 75억 명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고,
공간으로 치면 어마어마한 우주의 수많은 별 가운데 지구라는 곳에,
그리고 지구 안에서도 대한민국에, 대한민국 안에서도 서울이라는 곳에 사는,
시간적으로는 영원과 비교하면 찰나에 불과한 7-80 년 밖에 못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누구누구보다 높다고 해도 나보다 높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기 꼬라지를 잘 알면 누구도 높이려고 들 수 없으며
그래서 높아지려는 마음을 스스로 경계하여 낮추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원하시는 낮춤은 이런 인간적인 겸손이 아니라
당연히 영적인 의미의 겸손, 곧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이에 딱 맞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이 바로 권고 19번의 말씀입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높일 수 없음은 말할 것 없고,
낮출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처럼 은총도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바다에 물이 다 모여들고 가장 많은 물을 담고 있듯이
사람도 낮으면 낮을수록 많은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높은 곳일수록 흘려버려 물이 고이지 않듯이
높이 오르려는 자는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과 경쟁하지 은총을 구하지 않지요.
이제 사랑의 낮춤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을 낮춥니다.
엄마는 기꺼이 아이의 눈높이까지 낮추고, 밑으로까지 낮춰 순종합니다.
사랑하는 남자는 사랑하기 때문에 애인에게 무릎을 꿇고 꽃을 바칩니다.
그러니 겸손의 낮춤보다 더 자발적이고 더 숭고하게 낮추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 누구의 사랑보다 크기에 가장 낮추십니다.
그것이 필리피 서의 그리스도 찬가의 내용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겸손과 낮춤에 프란치스코는 감격하여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형제회에 보낸 편지)
높은 사람은 혹 인간의 존경은 받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받지 못합니다;.
낮은 사람이 혹 인간의 멸시를 받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반드시 받습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 있느냐, 사람 앞에 있느냐의 문제인데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도록
오늘부터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