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하는 신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으며 대상이 필요하다.
사랑은 사랑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신비다.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알게 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하는 선은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주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고
참여하는 사랑으로 알게 되는 앎이다.
우리를 매력으로 이끌어주시는 선하신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에 이끌려
관계성 안에서 구체적인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앎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객관화된 사물을 아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이러한 앎은
사랑으로 선택하는 영의 활동 안에서 구체화 된다.
사랑을 시작하신 분은 아버지의 영이시다.
아들 예수에게 당신의 전부를 남김없이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사람이 되신 예수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드렸다.
사랑에 대한 응답은 언제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끊임없이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영과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선포하시고 관계성 안에서 발견하도록 하신 예수님,
고난을 받아들이시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로 만드시고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삼위일체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관계의 모델이며 거울이 되어 인간의 삶을 비춘다.
우리는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봄으로써 영감을 얻어
관계성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선으로 하느님 사랑에 참여한다.
참여하는 선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관계성 안에서 경험하도록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봄으로써 알게 되는 앎이기에 신비적이다.
그러므로 거울에 비친 우리의 관계성을 바라보고
관계성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면서 발견한 하느님을 피조물과 함께 공유하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을 공유하는 관계로 만들어가는 앎이야말로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도록 돕는다.
사랑은 참여로서만 아는 지혜다.
받은 사랑, 받는 사랑, 받게 될 사랑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싹트고
행동하는 자비로 자신을 내어주면서 관계를 시작하는 땅,
그 땅에서 우리는 숨 쉬고 살아간다.
저는 속물 중 속물입니다. 비워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갖도록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