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욥기의 얘기는 두 번째 친구의 충고에 대한 욥의 대구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느님께 충실한 신앙인이고
고통받는 친구에게는 우정이 있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욥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서는 같이 목 놓아 울고
겉옷 찢고 머리에 먼지를 얹고 이레 동안 아무 소리 없이 함께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괜찮은 친구들입니까?
그러다 어제 본 것처럼 극심한 고통 때문에 욥이 자기 인생을 저주하고,
고통에서 건져주시지도 않고, 죽여주시지도 않는 하느님께 원망하자
친구들은 한편 하느님을 변호하고, 다른 한편 욥에게 충고를 합니다.
첫째 친구는 불행의 근원에 대해 얘기하며
미련한 자는 역정을 내다가 죽고, 우둔한 자는 흥분하다가 죽는다며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에게 투덜거리지 말고 하느님께 호소하라 하고
그러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이라고 하느님을 변호합니다.
둘째 친구는 욥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토로하며
자기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 이런 고통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잘못이 없는데도 하느님께서 터무니없이 벌을 내리시겠냐며
악인에게는 가차 없으시고 의인은 살리시는 정의로운 하느님이라고 변호합니다.
그러니 욥의 친구들은 틀린 말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변호하느라 욥의 심정을 그저 알아주는 데는 실패합니다.
그래서 욥은 나도 그런 줄 알고 있다며
그러나 지금 자기가 느끼는 절망스러운 하느님에 대해 오늘 얘기합니다.
인간이 고통 한가운데 있을 때 느끼는 하느님은 절망스러운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절망스러운 하느님이란 첫 번째로 독단적인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지혜가 충만하시고 능력이 넘치시는 분”이시고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측량할 수 없는 위업을 이루시는 분”이시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하시어 그것을 뒤엎으시는 분”이시며, 이에 대해
왜 그러시는지 아무 설명 없으시고, 우리 인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느님은 매우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하시다는 것은,
능력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나 힘 세다는 뜻에서 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과 호소에도 꿈쩍 않고 물러서지 않는다는 뜻에서 강한 겁니다.
우리 인간은 마음이 약해서 벌을 주다가도 그만두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과 호소에 꿈쩍 않으시고 냉엄하십니다.
그래서 욥은 이런 절망스러운 말을 합니다.
내가 불러 그분께서 대답하신다 해도
내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리라고는 믿지 않네.
그렇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고통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믿지 않고,
하느님께서 내 말 들으신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으며,
그저 침묵하시는 분으로만 느껴지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느낌입니다!
들으시는지 안 들으시는지 알 수는 없고 그런 느낌만 듭니다.
왜 침묵하시는지 알 수는 없고 그저 침묵만 크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느낌 때문에 믿을 수 없는데, 이 침묵의 뜻을,
나중에 알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지금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