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신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고통을 겪고 있기에 뭔지는 어렴풋이 알지만
왜 고통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 말은 이런 뜻도 됩니다.
고통이 왜 있는지 불교가 얘기하는 이유는 명확하기에
불교에서는 고통이 신비라고 할 것이 못 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고통의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기에 신비라고 한다고.
불교의 고통은 자업자득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자기 업보라고 말하지요.
쉽게 얘기하면 다 자기가 잘못해서 고통을 겪는 것이고 누구의 탓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고통은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고 그래서 신비라고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왜 고통이 나왔는지.
다시 말해서 사랑이신 하느님이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지.
왜 착한 사람에게 고통이 있고 악한 사람보다 더 고통이 큰지.
그런데 하느님이 왜 그리하셨고, 하느님이 왜 그러신지를 알 수 없는데,
실은 고통에 대해서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신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오늘 욥기는 왜 고통이 있는지 따지는 욥에게
모든 것이 어떻게 있게 되었고, 어떻게 그리되는지 아느냐고 물으시고,
그 모든 것들은 네가 모르는 영역이며, 하느님 당신의 영역이라고 하십니다.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고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
죽음의 대문이 네게 드러난 적이 있으며 암흑의 대문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신비는 하느님의 비밀이고,
인비 곧 인간의 비밀과 다른 하느님의 비밀입니다.
인간의 비밀도 알 수 없고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데
하느님의 비밀은 더더욱 알 수 없고,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의 비밀을 인간이 알려고 하지 말고, 따지지 말라는 것이
오늘 욥기의 하느님이 욥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오늘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욥은 이제 받아들입니다.
지금까지 욥은 친구의 훈계가 아니라 주님의 답이랄까 음성을 듣고 싶었던 겁니다.
그 이유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신비이어도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고통은 신비이니 알려고 들지 말고,
다 이해하려고 들지 말며
따지는 것은 더더욱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부터 제가 연피정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혹 프란치스코 대축일에는 올리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돌아와 다음주 토요일부터 강론을 올리겠습니다.
저희에게도 기쁜 말씀 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