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복음사가는
자캐오를 세관장이라고 표현하면서
부자라는 말을 함께 언급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리들은
부정적으로 돈을 벌었고
그래서 대부분 부유했습니다.
자캐오는 세리들의 장으로서
아마 더 부유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굳이 부자임을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데
복음사가는 그가 부자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말 속에 횡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마 그는 횡령을 통해서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가 부유한만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혼자 외로이 살았을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거부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도
군중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면,
사람들은 키가 작은 그를
자신들의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었을텐데
그는 군중 뒤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부당함과 외로움으로
그의 삶은 표현됩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십니다.
자캐오의 죄에 대한 용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조건 없이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를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 수용은 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자캐오는 재산을 쥐고 있던 손을
살며시 풀게 됩니다.
거부당함과 외로움 속에서
자캐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재산을 더 움켜쥐는 것이었습니다.
급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가 도움을 받을 곳이 없다는 생각은
그가 쥐고 있던 손에 더 강하게 힘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자캐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름 때문에,
즉 그도 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 이상 버림받지 않고 받아들여집니다.
거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가 죄를 지었든 아니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받아들이십니다.
우리가 열심한 사람이든 아니든
하느님을 거부하든 받아들이든
어떤 조건도 없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의 그 사랑을
자캐오처럼 우리도 받아들일 때,
우리도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