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억지로 공통점을 찾는다면
위로와 격려를 받건 보답이나 상급을 받건
받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생각하다가 받는 나와 받지 않아도 되는 나 가운데
어떤 내가 더 낫고, 어떤 내가 되려고 노력해야 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받는다든지 도움을 받는 것과
풍족하여 돈이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리는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필요 충족 차원에서는 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
그래서 받지 않는 편이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차원에서는 어떻습니까?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되겠습니까?
그런 관계는 사랑이 전혀 없는 관계가 아닙니까?
이런 면에서 격려와 위로를 서로 주고받는 것은 사랑이고
격려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뭐든지 자신만만하고,
위로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복하여
‘나는 격려와 위로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하는 것보다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상태가 오히려 더 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답을 받는 것은 어떻습니까?
보답도 받는 것이 받지 않는 것보다 낫습니까?
사랑을 역시 기준으로 할 때
보답을 바라고 뭘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이고 심지어 뇌물이며
그래서 그런 행위로는 보답을 받아도 행복하지 않고
보답을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것을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철학자들이 인생의 지혜를 논하는 정도에 불과하고
인간끼리 주고받는 것을 논하는 것이니 신앙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인간끼리 주고받을 때 그 사랑을 인간적인 사랑이라고 함과 같이
위로와 격려도 인간에게서 받고자 할 때 그것은 사랑일지라도 받은 것이
인간적 사랑에 그치고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를 대신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위로와 격려는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적인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을 대신하는 거라면
그것은 받아도 충분하지 않고 어쩌면 불행입니다.
지금 우리는 또다시 젊은이들이 떼죽음을 당한 대참사를 경험하고 있는데
이들 부모에게 우리가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표해야겠지만
우리의 인간적인 위로와 격려로는 그 부모들에게 부족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신앙인은 신앙인다운 위로와 격려를 해야 하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누는” 것으로 얘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와 위로를 받을 때
우리가 받은 그 같은 위로와 격려를 다른 사람에게 해줄 수 있을 것이고,
이번 참사자들의 부모들에게도 같은 위로와 격려를 해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