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 간에 서로 부르는 호칭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합니다.
개신교는 서로 ‘집사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호칭에 대해 비아냥대거나 비판할 때
형제로 대하지 않으면서 형제라고 부른다고 비판하고,
너도나도 다 집사이고 집사 아닌 사람이 없다고 비아냥댑니다.
사실 오늘 주님께서 집사의 비유를 드실 때
군중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요.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러니까 일반 군중이 아니라 당신 제자들이 집사라는 말씀이고,
당신 제자들이 집사로서 역할을 충실하고 정의롭게 수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에게 대입하면 집사란 일반 신자가 아니라
신자들을 잘 돌보아야 할 사제를 말하는 것이고,
개신교에서는 목사와 일반 신자 사이에 직책을 맡은 사람일 겁니다.
그런데 협의적으로 얘기하면 이런 뜻이지만
넓은 의미로 얘기하면 꼭 그런 것만 아닐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신부나 수도자뿐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다 제자지요.
그러므로 나는 집사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주님이 부여하신 직책 곧 제자직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오히려 얘기해야 합니다.
실제로 본당이나 재속프란치스코회 안에서
책임을 맡으라고 하면 거부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교회나 복지시설 봉사자가 점점 줄어드는데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의 시간과 힘을 그런 것에 쓰고 싶지 않고
산과 들로 놀러 다니는 데 쓰고 싶고,
도자기를 만든다든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취미생활 하는 데 쓰고 싶고,
내 영혼을 건강하고 살찌게 하려고 좋은 강의 듣는 데 쓰고 싶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2번에서 이렇게 비판하십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버립니다.”
오늘 비유에서 집사가 불의한 이유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기 때문인데
어떻게 보면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준 것도 낭비이지만
주님은 그것이 영리한 행위이고 그래서 불의한 집사를 영리한 집사라고 하십니다.
일반 세속의 주인에게는 그런 행위가 주인의 재산을 제멋대로 유용하는
또 다른 불의가 되겠지만,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에게는
그것이 유용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적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선(재산) 곧 시간이나 능력이나 은총을 우리에게 주실 때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하는 데 쓰라고 주신 거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간다고, 곧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산다고 한탄한 다음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라고 필리피 신자들에게 역설합니다.
하늘의 시민인 우리도 과거 하느님 것으로 우리 배 채우는 데만 힘썼다면
이젠 그러지 않는 곧 하느님의 선을 이웃과 나누는 영리한 집사,
곧 한때 불의하였지만 이젠 이웃을 사랑하는 영리한 집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