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십자가 아래의 어두움(1867)
작 가 : 구스타프 도레(Gustave Doré, 1832-1883)
크 기 : 석판화 190X240cm
소재지 : 개인 소장
오늘처럼 영상 매체가 발달한 시대는 이것이 종교적 지식의 전달에도 좋은 도구임을 알기에 여러 영상 매체가 종교적 지식 전달에 자연스럽게 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영상 매체를 사용할 수 없었던 시대에는 여러 화가가 신앙의 내용을 그린 성화가 주요 전달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작가가 개발한 삽화적 방법을 이용한 성화집이 발간됨으로 신앙의 내용이 훨씬 더 정확하고 감동적으로 전달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몇 년 전 한길사 출판사에서 작가가 그린 241편의 성서 주제 작품을 책으로 출판하면서 작가의 진면모를 국내에 소개하게 되었고 작가의 작품이 성서를 주제로 사실성과 낭만성을 잘 표현해서 관람자들에게 감동적인 설득력을 줄 수 있기에 일부 개신교도들에게도 좋은 감동을 주고 있다.
작가는 프랑스의 삽화가이자, 판화작가이며, 성서의 내용들을 소재로 한 판화 제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1832년에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스트라스부르에서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재능이 풍부한 그는 소년 시절부터 성서와 신화 이야기에 나오는 무용담을 좋아하였고 다섯 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탄생한 지역은 시대를 두고 독일과 프랑스가 자기 소유로 만들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상반되게 보이는 독일과 프랑스의 특성을 무리 없이 통합한 아름다운 전통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이 작품에서도 이것이 면밀히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적인 낭만성과 논리적 사고가 강한 독일인의 심성이 무리 없이 조화되어 관객들의 마음을 신앙의 내용으로 인도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석판화와 삽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화가가 되기 위한 정규교육은 한참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유명해지고 그의 작품이 전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은 성경을 시각화하면서부터였다.
이전의 다른 그림보다 사실적이고 과감한 묘사가 많은 사람의 호응과 찬사를 받았다.
그는 자기 작품의 감동성과 매력을 더 하기 위해 나폴레옹 시대부터 프랑스가 중동지역에서 가지고 온 문화재들을 연구하고 그것을 그의 판화에 도입하였으며 이것은 특히 그의 성서 작품에서 괄목할 만한 감동과 현실성을 더하게 되었다.
성서를 통해 제시되는 예수의 모습과 행적이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낭만성을 통해 매력을 느끼게 만들면서 예수 시대의 고고학적인 정확한 모습을 통해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예수의 행적이 현실로 다가오도록 배려함으로써 대단한 호응을 받게 되었다.
그의 이런 의도는 작가의 자질을 미리 알아본 당시 유럽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다른 화가들이 자기 작품을 통해 그의 작품의 경향과 화풍을 도입하면서 그의 진가를 더 알려지게 했다.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그의 선과 터치에 매혹되었고 이것을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
가령 반 고흐는 도레를 '최고의 민중화가'라고 평가하면서 그의 작품 “교도소에서 산책”이라는 작품에서 도레의 경향을 원용해서 그의 작품을 새롭게 그려보기도 하였다.
그는 다른 작가와 달리 특별한 교육이나 실습의 기회도 얻지 못한 처지에서 이런 감동의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의 성장 환경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작가가 어린 시절 살던 곳은 라인 계곡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고딕 성당과 공공건물 들이 늘어서 경관이 매우 뛰어난 곳이며 스트라스부르그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고딕 대성당이 있었기에 이것은 그의 인생에 큰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 역사와 함께한 문화적 환경은 도레의 상상력에 깊이를 더해주었다.
오늘 이 도시는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으나 그 지명이 독일식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의 작품 경향을 이해하는 데 좋은 포인트로 제시될 수 있다.
도레는 기존 서양화가들의 도상학을 계승하여 자기의 작품이 너무 이질성을 띠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기존에 많이 그리지 않았던 신약성경 장면 등을 독창성 있게 담아냈기에 유명한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작가가 공식적으로 종교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지만 그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신앙의 문제에 관해 자주 토론했다는 것을 통해 그는 껍데기 신앙인도 신앙을 출세의 도구나 포장지로 사용하는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는 인위적 냄새를 피우지 않는 평범한 삶의 환경에서도 신앙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던 온돌방처럼 훈훈한 가톨릭 신앙 표현을 한 신앙인으로 살았으며 이것이 그의 작품을 단순히 인위적인 인상으로 관객들에게 제시되지 않고 성서가 주는 생명 있는 감동을 전달하는 좋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는 알려진 특별히 경건한 신자는 아니었으나 신앙적 가치에 깊은 매력을 느끼면서 이것을 그의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노력했기에 그의 작품은 예수님의 생애의 많은 부분을 소개함으로써 작품집이 펼쳐진 성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오랫동안 인간적 깊은 우정을 쌓아온 가톨릭 성직자인 프레드릭 하퍼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을 크리스천 선교사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그는 이 작품집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구체화해서 가톨릭 신자로서 하느님을 찾는 많은 사람에게 그가 그린 펼쳐진 성서를 통해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선교사의 역할을 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이룬 성서 작업들은 단순히 유럽 화단의 안정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당시 유럽 사회를 휩쓸고 있던 산업화 시대에 만연해서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대해 경고를 하면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앙에 대한 기억을 일깨웠다는데 큰 가치가 있다.
또 신약성서에 실린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주제로 한 장면들은 그가 가장 큰 노력을 기울여 완성했고, 종교적 신성함과 웅장한 바로크적 구성, 사실적 묘사 등 다양한 회화 기법들을 사용했기에 그가 창안해낸 화면들은 웅장하고 감상자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었는데, 작가는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관객의 시선을 관람자의 시선이 아니라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재치 있게 사용해서 그 효과를 더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예수님 생애 가장 극적이던 십자가에서의 운명 장면이며 성서의 다음 내용의 표현이다.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루카 23,44-49)
신약 성서 전체에서도 가장 슬프고 비참하면서도 실망으로 이끄는 장면이다.
예수님이 너무도 비참하고 무능한 모습으로 인생을 마치는 것을 보면서 그분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인지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이 참으로 옳은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두 사형수 사이에 비참한 모습으로 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주변에 두 그룹의 서로 다는 군상이 등장해 있다.
한 그룹은 예수를 죽이는데 협조했던 군사들이며 이들은 세상 권세의 상징이다.
한마디로 막강한 힘을 가진 집단, 아무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다는 인정을 받는 집단이며 이런 집단이 존재하는 곳은 항상 불안하기 마련이며 오늘 우리 현실에서 너무도 강하게 체험할 수 있는 삶의 실상이다.
그다음 십자가 주위에 여인 몇 명이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데, 군인 집단들과는 전혀 반대되는 집단이다.
이들에게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아무런 기재도 없는 처지에서 가장 실패하고 무능한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운명한 예수님을 붙들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 앞에 캄캄해진 골고타 언덕의 어둠을 뚫고 찬란한 빛이 쏟아지고 있다.
이 빛이 어둠을 다 몰아내지도 못한 처지인데도 군인들에게는 극심한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
빛을 피해 도망을 치는 모습이다.
자기들의 처신은 완벽한 승리의 결론인데도, 이들은 패배자처럼 허둥대며 도망치고 있다.
반면에 운명한 예수님을 달고 있는 십자가 곁의 여인들은 십자가를 지키고 있다.
이들은 성서의 말씀을 믿고 골고타의 어둠을 깨트리기 위해 비추기 시작한 빛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빛은 이들 주위에까지 영향을 주지 못했기에 그들은 아직 어둠 속에 있으나 빛의 존재를 확인했기에 동요하지 않고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
작가는 이것을 통해 크리스천 신앙의 핵심인 부활신앙은 믿어야 할 어떤 신조 보다 더 강한 삶의 확신임을 선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요한 2,22)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필리 3,10)
작가는 참으로 인간 삶의 고통과 불안, 실망 속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감동을 너무도 현실감 있게 표현했기에 어떤 명설교자의 강론보다 더 감동적으로 확실히 크리스천 신앙의 핵심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에드먼드 올리에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남겼는데 참으로 설득력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현대와 같은 영상 매체가 되지 않았던 시대에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복음과 신앙을 위한 교육에 대단히 효과적인 자료로 부상했으며 우리 교회에서는 신자 교육을 위한 요리강령이라는 제목으로 사용되어 예비자들의 교리 교육뿐 아니라 신앙의 내용을 정직히 표현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되곤 했다.
이것은 또한 예비자 교육용으로뿐만 아니라 19세기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신자들에겐 이 책의 소장이 곧 크리스천 신앙의 기본을 알고 있다는 표지로 이용되어 오늘 신자 가정에서 십자가를 벽에 모시는 것처럼 크리스천 가정의 고급스러운 소장품 역할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