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지난 주일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할 때 그 돌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아니, 그 파괴를 내다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이 울음의 의미는 죽음을 앞둔 부모의 울음과 비교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기 자녀가 의좋기를 바라고,
의좋은 형제는 ‘의좋은 형제 비’가 있을 정도로 모두가 칭송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부모는 자녀가 이렇기를 바라는데
부모의 재산을 놓고 또는 사랑을 놓고 서로 싸운다면
부모가 어떻게 맘 놓고 세상을 뜰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죽을 때까지 그런 자식들을 보면 오늘 주님처럼 눈물을 흘릴 겁니다.
오늘 주님의 눈물도 그런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거기서 돌아가실 텐데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보람이 하나도 없게 그리고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싸움박질만 하다 망할 것을 내다보시고 흘리는 한탄의 눈물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오늘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한탄하신 다음 예루살렘이 망하게 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은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실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함께 하느님께서 이미 찾아오신 것을 예루살렘이 몰랐던 것이고,
그리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것을 보지도 알지도 못한 것은
그들의 눈에 그것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을 시작하시며 당신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이 세상과 예루살렘을 찾아오신 것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것인데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 예루살렘이 당신도 죽이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라 싸우다가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까?
당신이,
당신의 가르침이,
당신의 가르침인 복음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루살렘이 모르고 지금 우리도 모릅니다.
평화의 길을 주님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찾아오셨어도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이 여전히 이웃 국가들과 싸우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대표되는 나토와 싸우고,
미국과 중국이 싸우고,
중국과 대만이 싸우고,
우리의 남북이 싸우고,
한미일과 북중러가 신냉전의 길을 가는 것이 다 이 때문입니다.
평화의 길을 찾으려 들지 않고 싸우려고만 듭니다.
근본적으로 평화 의지가 없고 호전적입니다.
평화 의지가 있다면 그 길을 찾을 텐데.
이 평화 의지가 없고 호전적인 이 세대를 보고
우리도 오늘 주님처럼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겠습니다.
남북의 평화를 위해서,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오늘 주보인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축일을 맞은
모든 재속 프란치스칸들에게 축하드리고,
같이 기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