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적 생명에 연결된 자유
하느님의 가난과 자기 비움을 배워야 나 자신을 온전하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내어 맡길 수 있다. (필립 2,6-12) 선은 위험을 감수하는 기쁨에서 시작되며 하느님이 감수하신 위험에 참여하기 위하여 나의 자유를 내어 맡기게 된다. 사랑받음에 대한 응답으로 표현되는 이 믿음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선물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하느님의 선물이 될 때, 너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허용하고 놓아주기 위해 내려놓고 내려가는 가난과 겸손의 구체적 실재인 죽음을 감수하면서도 내어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은 내어주는 사랑에서 나오는 죽음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자유를 허용하시는 하느님께서 허용하시는 만큼 위험도 감수하신다는 사실은 우리를 감동케 한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 그것이었다. 자유를 주기 위한 대가를 치르신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이것이 내가 나에게서 해방되는 비결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는 옳은 일이 아닌 변함없이 잘못된 일을 행함으로써 하느님께 오게 되었다. 우리는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으로 훨씬 더 많이 배우게 되었다. 나이가 많을수록 실패와 모욕, 고통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는 경험된 진실을 알게 된다. 허물어지는 체험이지만 자신을 붕괴하는 것만이 더 깊은 곳으로 가게 하는 비결이다. 변화는 여기서 일어난다. 내려가는 죽음과 내려놓는 죽음, 그리고 허용하고 놓아주기 위한 위험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더 큰 일치를 향해 자신을 초월해 나가려는 의지로 충만해진다. 삼위일체 생명은 신적 관계성이 인간성 안에서 내어주는 사랑으로 꽃피어 관계적 변화로 나아가도록 비추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하느님 나라는 내어주는 사랑이 하느님 안에서 쉬는 자유로 느껴질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여로써 경험되는 지식이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깨달음이었다. 우리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자유를 하느님과 너에게 내어놓음으로써 해방되는 자유이며 이로써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쉬는 자유가 관계 안으로 흘러 들어가 관계 안에서 신적 생명으로 연결되어 원복을 발견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네가 자유로우면 나는 더 자유롭고
내가 자유로우면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좋아하실까?
네가 기쁘면 나는 더 기쁘고
내가 기쁠 때 하느님의 기쁨은 얼마나 크실까?
하느님 안에서 쉬는 자유야말로 신적 생명에 연결된 사람이 누리는 자유다.
내려갈수록 올라가는 길
내려놓을수록 풍요로워지는 길
허용하고 놓아줄수록 자유로워지는 길이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