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느닷없이 ‘관상’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관상 타령을 할까 합니다.
관상은 하느님 관상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하느님뿐 아니라 나도 보고, 이웃도 보고, 다른 자연도 보는 것이라고
저는 자주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주장합니다.
나를 보더라도 나의 고통을, 욕망을, 갈망을, 보고,
나의 고통을 보면서도 고통만 보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도 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도 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보고,
나의 고통만 보지 않고 이웃의 고통까지 사랑으로 보는 것,
뭐 이런 것이, 관상이고 진정한 관상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관상이 아니고,
사랑으로 보는 것이 관상이라고도 얘기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라 고통에 나의 시선을 빼앗긴 것이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실은 관상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관상도 하느님을 보는 것이지만
하느님만 보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사로잡힘이지 진정한 관상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얼마 동안 완전히 하느님께 몰입되고
성인들이 탈혼 상태에 있듯이 하느님께 사로잡힐 수는 있어도
계속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런 관상을 진정한 관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느님 관상은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라고 제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오늘 관상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 때문입니다.
Say to those whose hearts are frightened:
Be strong, fear not!
Here is your God.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러므로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보면/관상하면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는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 병자와 동료들은 바로 이렇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어느 마음에 들어오셨을 때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은
주님께서 어쩌시나 보려고 왔지만, 이들은 치유를 받기 위해 옵니다.
중풍 병에 맥없이 주저앉아있지 않고 어떻게서든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왜? 물론 치유 받기 위해서지만
그 이전에 주님의 능력을 보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 이들이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고, 그런 주님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치유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관상이 치유와 구원에까지 이르는 것을 본 오늘 우리입니다.
어제 강론이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