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된 존재에 생명이 흐르게 하는 선
내 존재의 뿌리는 사랑에 찬 하느님의 완전한 자유와 의지에 따라 창조되었다.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려는 나의 자유와 의지에 저항하는 죄는 관계 안에서 자신만을 챙겨보겠다는 탐욕과 이기심에서 나온다. 내 존재의 정체성으로 향하는 선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공유된 선으로 공존을 택하기보다 홀로 자족하려는 자만심에서 나오는 죄는 우리를 존재케 하는 생명의 흐름을 막고 움직임과 성장을 가로막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외롭고 우울하고 난폭해진다.
관계성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선이 서로를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그러므로 관계를 잃으면 하느님을 잃는다. 우리를 존재케 하는 하느님의 무상성에서 경험하는 자비와 선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이지 우리의 업적과 공로에 따른 보상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 받기에 존재한다. 사랑받고 그 사랑을 전하는 과정에서 선의 확장을 본다. 하느님의 고유하고 본질적인 삼위일체 관계성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고유한 생명을 나누는 존재들이지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창조된 존재에 생명이 흐르게 하는 선으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역동적인 에너지를 나누라는 초대에 나의 자유로운 응답은 하느님을 아는 경험된 지식에 근거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고한 지식의 가치를 위해 사도 바오로는 자신에게 이로움을 주었던 율법적 근거를 버렸다.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을 꼭대기에 두고 살기에 변화를 두려워한다.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필립3,7)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는 서로를 알고 사랑을 나누듯이 인간의 인격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동등한 위치에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존중하실 뿐 아니라 동등함을 넘어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자리로 내려가셨다. 사랑하려면 반드시 내려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기에 자신을 낮추시는 하느님의 가난과 겸손이 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와서 배워라”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에는 가난과 겸손이 있다. 내려놓고 내려가서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살도록 허용하고 놓아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인간의 인격이 삼위일체의 무한한 사랑에서 창조되었음을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건 없이 하느님으로부터 무상으로 사랑받는 존재들이다. 가짜들은 언제나 조건적인 사랑만을 선호한다.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선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나쁜 사람들을 벌하시기로 작정하신 분이 아니시다. 사랑이 본질이지 어떤 때는 사랑하고 어떤 때는 사랑하지 않는 분이 아니시다. 깐깐하고 변덕스러운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은 가짜들이 만든 하느님이다.
삼위일체는 믿는 이들이 인식의 대전환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삼위일체의 인식체계가 없이 관계를 변화시키기는 불가능하다.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배우는 진리는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요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자리임을 일깨워 주신다. 오직 이곳에서 쉬고 즐길 수 있을 뿐이다. 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신 요한 사도의 말씀으로부터 삼위일체 하느님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관계를 배우고 그 안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은 내 기쁨의 원천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그와 같은 기쁨이 계속해서 샘물처럼 솟아날 것이다. 친구요 연인이며 아버지이신 분께서 나와 동행하시면서 나를 다정하게 돌보시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삼위일체 하느님의 품에서 나오는 창조된 존재에 생명이 흐르게 하는 선이야말로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하느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