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하고,
최후 만찬의 복음에서는 "그때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요한뿐이었겠습니까?
오늘 같이 무덤에 달려간 베드로는 주님께서 사랑치 않으셨고,
열두 제자 중 다른 제자들은 주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셨을까요?
다 사랑하셨어도 혹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사랑하지 않으셨을까요?
혹 인간 중에는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가 있을 수 있지만
주님은 그럴 리 없다는 것이 예수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유일하게 얘기하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나
예수님의 '사랑받은 제자'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이겠습까?
사랑을 주고받는 데 두 가지가 있고,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을 받고자 하는데 주지 않아,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와
사랑을 주는데도 받지 않아,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후자의 경우 정확히 얘기하면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받지 않는 거지요.
그러므로 누가 사랑을 받는 것은 양쪽이 일치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지요.
받고 싶은데 주고 싶지 않다고 하면 받을 수 없고
주고 싶은데 받고 싶지 않다고 하면 줄 수 없는 거지요.
그런데 사랑에는 기울기가 있습니다.
똑같이 사랑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와 자식 간에는 사랑의 기울기가 있습니다.
엄마의 사랑이 자식의 사랑보다 훨씬 크잖아요?
그래서 엄마는 자식을 사랑하는데 자식은 엄마만큼 사랑하지 않고,
심지어 엄마보다 이성이나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합니다.
이성이나 다른 사람의 사랑이 엄마의 사랑보다 못한데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랑을 받는 것이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줘도 내가 받아야지 받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받지 못함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거겠습니까?
하느님 식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 식의 사랑은 우리 식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사랑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고 그래서 귀로 고백을 들으며,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껴안으며 아무튼 감각되어지는 사랑입니다.
남녀 간에 '꼭 말로 표현해야 알아?'라고 하면
'말로 표현해야 할지!'라고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요한도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임을 강조하여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오신 분은 볼 수 없는 하느님이
볼 수 있는 분, 만져볼 수 있는 분으로 오신 거라는 얘기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와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너무도 감동과 감탄을 하며 감사드리며 그 사랑을 눈으로 보고 또 보고
싶어서 성탄 구유를 만들어 베틀레헴의 성탄을 재현하기까지 하였잖아요?
그러나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줘도 받아야 받는 것처럼
보여주셔도 봐야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