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묵상을 하던 중 프란치스코가 몇 살에 돌아가셨는지 따지다가
저는 너무 많이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이 있는지,
언젠가 죽을 것인데 왜 사는 것인지,
오래 사는 사람은 왜 오래 사는 것이고
일찍 죽는 사람은 왜 일찍 죽는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오래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일찍 죽는 것인지,
이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하면 훌륭한 삶이고
그렇지 않으면 삶을 잘못 산 것이지.
그런데 많은 일, 업적, 장수, 이런 것을 생각하니
왠지 다 그런 것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고
오래 산다는 것도 추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것을 초월하는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이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가치랄까, 가치 기준이랄까,
그런 것이 꼭 있을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 세상사는 동안 남겼다 해도
결국 죽고 마는데 자기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결국 죽고 마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잘 살고 못 사는 것의 절대적인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그리고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잘 죽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화로운 삶이었어도 죽을 때 잘못 죽으면,
다시 말해서 최후가 좋지 않으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지요.
그리고 젊어 아무리 칭송받는 삶을 살았더라도 변절한다면 그 인생도.
그렇다면 다시,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이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 묻게 되는데
그것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죽음이 잘 죽는 죽음이고 그리고
그것은 또 영원하신 하느님 손안에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시간적으로는 영원을 향하여 정렬되어 있어야 하고,
인격적으로는 하느님을 향하여 정렬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당장의 이익과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인생이 이리저리 흔들리면 안 되고, 대열이 흩어져서도 안 되며,
이 사람에게 끌려가고, 저 사람에게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겠지요.
오늘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은 하느님께 직행한 아기들의 죽음입니다.
헤로데에 의해 죽었지만 실은 주님 때문에 죽은 아기들이고,
그래서 오래 살아 죄에 오염되는 일 없이 하느님께 직행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축일의 의미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교회의 답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에게서 어떻게 세상의 죄와 악이 나오는지?
사랑이신 하느님이신데 어찌 세상에 고통이 있으며
죄 없는 사람과 착한 사람이 고통을 더 받는지?
하느님은 사랑하시기에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자유를 주셨기에 죄를 짓기도 하고, 죄로 인한 악도 발생하며,
자유를 주셨지만, 유한한 이 세상에서는 한계를 주셨기에
유한한 이 세상에서 유한한 인간이 겪는 것이 고통과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통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다만 그 고통과 죽음이 영원과 하느님을 향한 고통과 죽음이냐 아니냐,
하느님을 위한 고통과 죽음이냐 아니냐가 다를 뿐이고 관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