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자신을 내어주면서 쉰다.
자신의 힘을 자신만의 상승을 위해 사용하고 공동선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데만 힘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에게 힘을 실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창조를 시작하셨다. 나는 자신을 내어주시는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창조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관계의 변화는 새로운 창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유된 선, 반사된 선이 관계를 비추기 때문이다.
세 위격들의 친밀한 신적 친교에 참여하도록 초대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쉬는 일이다. 우리는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쉬는 법을 모른다. 하느님의 거처가 사람들 사이에 있고 하느님 나라가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우리는 관계 속에서 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관계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보다 사랑하려는 의지가 크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 쉴 줄 모른다.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바쳐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쉴 수가 없다.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적 사랑보다 무엇인가를 바쳐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바치면 조금 주시고 많이 바치면 많이 주고 아무것도 바치지 않으면 안 주시는 하느님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친교에 들어선 이들은 자신을 내어주는 다른 이들과의 친교에도 쉽게 이르게 된다.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의 확산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내어 맡김, 양보, 신뢰, 내어줌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만을 챙겨보려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힘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다 보니 관계 속에 있는 공동선을 잃어버렸다. 공동선은 관계의 변화에서 나오는 쉼의 공간이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하느님의 거처가 우리의 쉼터다. 우리의 일상의 관계들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느님 나라의 보물이 묻혀있는 밭이 거기에 있다. 이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힘을 포기하고 내어주는 일에 힘을 쏟기 시작한다. 하느님의 무상성을 깨달아 손에 들려있는 손익 계산서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기쁨과 자유 안에서 신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자신을 내어주면서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