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원천을 성찰하기
나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내 믿음의 근본을 이루는 힘의 원천을 성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신적인 에너지가 내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감싸고 있음을 매일매일 확인하면서 원천으로부터 오는 그 힘의 영역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가운데 선택하고 결단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의 축제에 참여하는 기쁨을 내 작은 몸짓으로 표현하면서 전적으로 내가 그 안에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사실을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공유하려는 것이다. 일상의 관계들을 평화롭게 허용하면서 살고 싶은 갈망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신적 현존 아래 머무는 피조물들과 더불어 공존의 지혜를 배우고 가난한 자각으로 창조 때 받은 순수를 되찾고자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힘의 원천을 성찰하는 이유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내가 힘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사용하여 신적 에너지를 가로막으려는 몸의 욕구들을 잠재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는 내가 어떻게 고요한 평화 안에 머물 수 있겠는가.
선과 자비와 거대한 생명의 흐름이 우주 안에 있음을 거룩한 도우미(성령)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인간의 탐욕이 만든 독점과 소유와 지배의 칼들이 관계를 난도질하고 생명을 위협하고 있어도 이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인간을 다른 피조물들보다 우위에 두려는 자아도취의 우월감 속에서도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우월하거나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다른 피조물들을 통해 보고 깨닫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프란치스코가 발견한 형제성과 평등성과 동등성이 거기에 있다. 같은 근원에서 나왔기에 형제적이다. 이 형제적 평등성이 창조주의 순수를 발견하게 한다. 모든 관계를 존중하고 개별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동등하기에 사랑하기 쉽다.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원칙이 사람에 대한 존중심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훌륭한 선생님들인 피조물들을 통해 배워야 한다. 창조주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며,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돌보시는 아버지의 자비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안에 몰려왔다가 사라져가는 생각들을 관찰할 수 있는 조용한 장소가 거기에 있고 인간은 피조물과 더불어 그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가며 쉬는 법을 거기에서 배운다. 이렇게 쉬는 상태를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라고 하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자기 내면의 영역을 지키고 보호하는 장소인 이 쉼의 장소에서 하느님이 나를 만나러 오고 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하느님 현존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선물로 받는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나와 더불어 행하고 사랑하는 일을 하신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현존과 더불어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기쁨이 넘치는 벅찬 감동들이 나에게 몰입된 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를 몰아낸다. 귀찮은 일들이 더 이상 귀찮은 일이 아니라 기분 좋게 하는 일이 되고 좋아서 하는 일, 하고 나면 더 좋은 일과 기뻐서 하는 일, 하고 나면 더 기쁜 일들이 복음이 된다. 너무나 적은 사람들만이 이 기쁨을 아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