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맞게 창조된 나의 실재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육화된 하느님 현존의 실재다. 우리가 경험하는 하느님은 진리이시며 선하시고 최상의 아름다운 분이시라는 것을 육화된 모든 피조물을 통해 경험한다. 하느님께서 무수한 모양으로 피조물을 창조하신 후 그들 안에 머무시며 당신의 자비와 선하심과 당신의 현존을 그들을 통해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별적으로 그 피조물의 하나이며 다른 피조물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다. 하느님의 현존이 그러하다면 우리도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을 조금씩 발견하고 알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창조된 피조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이를 돌보시는 분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부른다. 인간을 제외한 생명 있는 모든 피조물은 사랑으로 돌보시는 영의 흐름에 저항하거나 부정하거나 멈추게 하지 않으며 자신의 운명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피조물은 저마다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산다. 가뭄과 홍수와 산불, 자연재해를 비롯하여 우주 전체가 참여하는 끝없는 순환과정을 받아들인다. 다만 사람만이 하느님처럼 되고자 저항하고 부정하고 흐름을 멈추게 할 뿐이다. 자신이 지배하는 왕국을 건설하려고 탐욕이 낳은 독점과 소유로 관계를 단절시키고 하느님이 주신 힘을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이익과 더 즐겁고 더 편안함만을 추구한다. 알맞게 창조된 나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이 되려 한다. 비교하고 경쟁하여 우월한 자신을 만들려고 하기에 만족하는 법을 모른다. 성프란치스코는 이러한 현상을 보고 형제들에게 말했다. “피조물은 저마다 창조의 목적에 따라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러니 피조물을 보아서라도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여기지 말아라.”
하느님의 은총은 알맞게 창조된 나를 아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비교평가는 창조주에 대한 모독이다. 하느님께서는 더 나은 내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창조 때 받은 그 모습으로 살아갈 때 은총의 실재를 경험하도록 하셨다. 하느님께 받은 것을 기쁨에 차서 돌려드릴 수 있는 것들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다만 ‘나’로 가득 차서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어둠의 세력이라고 부르는 사탄의 정체는 바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이다. 사탄은 언제나 다른 이들을 고발하고 알맞게 창조된 자신의 실재를 부정하고 반대하며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갈라놓는다. 미워하고, 설치고, 헐뜯고 죽이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해방은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이다. 신적 본성을 나눠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난 나를 아는 것과 나를 지으신 분의 뜻을 발견하는 것, 삼위일체의 신적인 생명의 잔칫상에 초대된 나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둠의 세력들이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위협하고 있다. 우상이라는 어둠은 나를 사로잡히게 만들고, 노예로 만들고, 결국에는 파멸시키면서 관계를 단절시킨다. 이 어둠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작은 빛 하나를 이겨본 적이 없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밝게 빛난다. 이 시대는 어둡고 우리나라의 현실은 더 어둡다. 상식과 공정과 정의가 사라지고 불공정과 불평등과 차별이 커지고 지배의 수단으로 독점의 정치를 하기 때문이며 이에 편승하여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이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행하는 작은 ‘선’은 작은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빛이 되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말하고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는 법을 배우면서 저마다 제 몫을 살도록 놓아주며, 상호 필요성을 채우면서 관계를 돌보는 일은 창조의 목적에 알맞은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다. 이것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의 사랑에 참여하는 이들이 나누는 생명이다. 여기에 나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열린다. 창조된 모든 생명이 숨 쉬는 우주 안에서 해와 달과 별들, 숲과 강과 바다의 생명들, 하늘을 나는 새들, 온갖 초목과 과일들, 이것이 나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느님 사랑의 표시다. 이런 것들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실재가 여기에 있다. 피조물들의 반란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피조물을 동등한 사랑의 관계에서 지배의 수단으로 격하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절의 역사다. 하느님과 단절된 인간, 인간과 단절된 인간, 피조물과 단절된 인간이 겪는 단절의 위기에서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다.
모두가 잘못하면서 살기 때문에 용서 없이는 못 산다. 용서가 자리 잡은 땅에는 내가 없다. 용서는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새로운 창조다. 어둠을 밝히는 최상의 빛이 여기에 있다. 나를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알맞게 창조하신 목적이 여기에 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더불어, 너와 함께 너와 더불어,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을 공유하고 공유된 선으로 공존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을 회복된 관계에서 경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