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오늘 죄짓고 숨은 아담에게 어디 있는지 물으십니다.
여기서 그의 물리적인 위치는 동산의 나무 사이입니다.
그러나 그의 심리적이고 영적인 위치는 하느님 앞을 피해서입니다.
어제 창세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리고 오늘 아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렇습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러니 아담의 심리적 위치는 두려움 가운데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두 가집니다.
알몸이 드러나는 두려움과 벌을 받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 죄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말에 알몸이 드러난다는 것은 죄가 드러나는 것이니
아담의 알몸이란 죄이고 우리도 알몸은 죄입니다.
사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인간은 옷을 입는데
옷이란 것이 치부는 은폐하고 멋지게 포장까지 하는 것이니
옷이라는 위선의 포장이 벗겨져 죄의 알몸이 드러나는 것은 끔찍한 것이지요.
인간은 자기의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심리적인 두려움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런데 아담에게는 심리적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두려움도 있지요.
영적인 두려움이란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요.
아무튼, 아담은 지금 두려움 가운데 있고, 하느님 밖에 있으며
두려움 가운데 있기에 하느님 앞에 있지 않는 것 이것이 지금 그의 위치입니다.
우리도 종종 심리적 두려움이 영적인 두려움으로 커져
주님의 계명을 어긴, 어쩌면 작은 죄인, 1차 죄가
주님을 피하는 더 큰 2차 죄가 되게 하곤 합니다.
어린애가 돈을 훔치고 그것이 드러날까 두려워 집을 나가버린다면
부모에게는 돈을 훔친 죄보다 부모를 떠난 죄가 더 큰데
우리 인간은 종종 이런 미성숙의 죄를 부모에게도 하느님께도 범합니다.
사랑을 믿기보다 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하느님께서는 벌주심도 사랑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