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Skip Navigation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조회 수 58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의로움의 차이를 극복하는 믿음

 

사도 바오로는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쓰레기로 버렸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필립비 3, 3-8

 

하느님의 의로움은 관계 안으로 선이 흐르게 하는 의로움이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 5,20-24)

 

거룩함과 의로움은 잘 지키고 많이 바치는 업적과 공로의 결과물이 아니다. 바리사이들이 찾는 의로움은 오직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만 중요했다.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준수와 도덕적 성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잘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철저하게 지키고 많이 바칠수록 의롭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킨 율법은 자아도취의 잣대가 되었고, 그 잣대가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종교심을 믿음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바리이의 잣대를 가지고 살아간다. 스스로 의롭고 거룩하다고 하는 교만한 신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기도와 희생을 많이 바치고 신심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이들이 찾는 것은 인과응보에 따른 처벌과 보상에만 관심을 두기에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이용의 대상일 뿐이다. 이용 가치가 없으면 쓰레기처럼 버린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룬 업적과 공로에 따라 보상이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만 있을 뿐,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흐르게 하는 행동하는 자비가 없다.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은 인과 응보적 논리로는 알아듣기 어렵다, 자신을 스스로 내어주시는 무상성과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보편성은 인간의 업적이나 공로에 따른 보상이 아니다. 하느님은 신비다 신비는 영의 활동이기에 인간이 만든 인과 응보적인 틀에 넣어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인과 응보적 논리가 무너져 내린 곳에서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의 신비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관대하심은 오직 내어주시기만 하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는 분노가 자리할 곳이 없다. 하느님이 삼위일체인 이상 화를 내시는 하느님은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분노는 인간의 인과 응보적 논리를 하느님께 투사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비난해야 할 상황이 되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탓할 대상을 찾는다. 이러한 탓을 하느님께 돌려 분노하시는 하느님을 만들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하느님께 적용한 나머지 용서하시는 아버지를 잃어버렸다. (루가 15,11-32 잃었던 아들) 그러한 논리로 죄를 묻지도 않고 잔치를 준비하시는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분노하시는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은, 통제를 위한 것이지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내세워 개인과 집단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내 탓을 네 탓으로, 우리 탓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린 역사가 인간의 역사다. 누군가에게 탓을 돌릴 때 단절의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는 하느님과 나, 너와 나, 피조물과 나 사이에 단절된 역사 안에서 살아왔으며 관계의 단절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 단절의 역사 안에서 원복(낙원)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결과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절의 역사를 회복의 역사로 바꾸시는 하느님이시다. (로마,5,1-21)

 

독점과 소유는 인간의 과도한 탐욕의 결과다. 독점과 소유는 신앙의 영역에까지 파고들어 관계를 어렵게 한다. 잘 지키고 더 많이 바치는 사람일수록 거룩하고 의롭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는 용서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꼭대기에 머물러 있기에 내려가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한다.

 

단절된 관계에 생명의 물줄기를 대주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흘러가게 하는 일만이 거룩하고 의로운 일이다. 지금 하는 일을 거룩하고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응답하는 신앙으로 바꿔야 한다. 과거에 받았고, 지금 받고 있으며 미래에도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 아래,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크고 감사해서 어떻게든 이를 하느님께 돌려드리기 위해 택하는 결단이기 때문이고,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통해 내어주는 몸이며 쏟는 피가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사랑하려는 의지보다 사랑받고 있음에 대한 확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필립 3, 8)

 

의로움의 차이를 극복하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믿음인가요?

선은 그 자체로 보상이며 악은 그 자체로 처벌입니다.

처벌하시는 하느님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바꾸는 믿음에 하느님 나라의 현재가 있습니다.

 

서비스 선택
<-클릭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
Powered by SocialXE

자유나눔 게시판

자유롭게 글을 남겨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68 부활은 역설의 행복 부활은 역설의 행복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내어주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넘치게 된다. 혼자만 먹으면 맛이 없다. 혼자만 가지려 하면 기쁨이 줄어든다. 혼자... 이마르첼리노M 2023.04.17 327
1367 죽음과 부활 (관계성의 신비) 죽음과 부활 (관계성의 신비)   내어주는 죽음이 내어주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죽음이 받아들이는 기쁨으로   내려가는 죽음이 내려가는 기쁨으로 내려놓는 죽... 이마르첼리노M 2023.04.09 398
1366 부활의 신비는 내어주는 몸과 받아들임의 신비 (성삼일의 묵상) 부활의 신비는 내어주는 몸과 받아들임의 신비 (성삼일의 묵상)   최후 만찬과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예수께서 보여주신 행동하는 자비는 계시의 완성이... 이마르첼리노M 2023.04.05 845
1365 성주간 (계시의 완성을 보는 때) 성주간 (계시의 완성을 보는 때)   자비를 깊이 바라보다가 자비가 되어 자비가 흐르도록 길을 떠나는 때   자비의 열매는 나의 필요성을 없앤다. 스스로 높일 ... 이마르첼리노M 2023.03.29 399
1364 꽃피는 계절에 꽃피는 계절에   꽃피는 계절에 향기로 다가와 볼을 비비는 이여!   벌들에게 꿀을 내어주면서도 순수한 꽃으로 남아계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생명이 만... 이마르첼리노M 2023.03.20 329
1363 인식의 차이 인식의 차이 대해서 아는 것과 아는 것    대해서 아는 것은 객관화된 지식이지만 아는 것은 경험된 지식입니다.   경험된 지식은 왜? 어떻게? 에서 나오는 것이... 이마르첼리노M 2023.03.19 311
1362 하느님의 무상성(빚의 탕감) 하느님의 무상성(빚의 탕감)     &quot;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quot; (마태 18,22)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이마르첼리노M 2023.03.15 341
» 의로움의 차이를 극복하는 믿음 의로움의 차이를 극복하는 믿음   사도 바오로는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쓰레기로 버렸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 이마르첼리노M 2023.03.03 585
1360 용서가 있는 곳에는 힘을 사용하라는 내면의 유혹이 있다. 용서가 있는 곳에는 힘을 사용하라는 내면의 유혹이 있다.   우리는 선을 행할 때마다 측은한 마음으로 돌보시는 하느님의 자기 비움의 고통에 참여한다. 너를 ... 이마르첼리노M 2023.02.22 639
1359 무엇을 구원이라고 믿는가? 무엇을 구원이라고 믿는가?   내 믿음의 토대는 인류 구원에 대한 속죄 이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론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참여... 이마르첼리노M 2023.02.14 383
1358 욕구 충족의 노예에서 욕구 충족의 통제에 이르기까지 욕구 충족의 노예에서 욕구 충족의 통제에 이르기까지   욕구 충족의 노예에서 욕구 충족의 통제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갈등과 넘어짐을 반복하면서 하느님... 이마르첼리노M 2023.02.10 557
1357 난 너의 좋은 데를 안단다. 난 너의 좋은 데를 안단다.   세상은 온통 작은 기쁨들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이 기쁨을 알아보는 능력이 없을 뿐이다.   하느님께서 새날로 주신 아침에 형제들... 이마르첼리노M 2023.01.30 503
1356 알맞게 창조된 나의 실재 알맞게 창조된 나의 실재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육화된 하느님 현존의 실재다. 우리가 경험하는 하느님은 진리이시며 선하시고 최상의 아름다운 분이시라는 ... 이마르첼리노M 2023.01.28 303
1355 힘의 원천을 성찰하기 힘의 원천을 성찰하기   나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내 믿음의 근본을 이루는 힘의 원천을 성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신적인 ... 이마르첼리노M 2023.01.26 369
1354 받아들여진 존재와 받아들인 존재는 하나의 몸이다. 받아들여진 존재와 받아들인 존재는 하나의 몸이다.   내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존재가 되는 것과 하느님께서 나에게 받아들여진 존재가 되는 것을 허용할 수 ... 이마르첼리노M 2023.01.25 333
Board Pagination ‹ Prev 1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104 Next ›
/ 104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