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움의 차이를 극복하는 믿음
사도 바오로는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쓰레기로 버렸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필립비 3, 3-8
하느님의 의로움은 관계 안으로 선이 흐르게 하는 의로움이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 5,20-24)
거룩함과 의로움은 잘 지키고 많이 바치는 업적과 공로의 결과물이 아니다. 바리사이들이 찾는 의로움은 오직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만 중요했다.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준수와 도덕적 성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잘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철저하게 지키고 많이 바칠수록 의롭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킨 율법은 자아도취의 잣대가 되었고, 그 잣대가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종교심을 믿음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바리이의 잣대를 가지고 살아간다. 스스로 의롭고 거룩하다고 하는 교만한 신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기도와 희생을 많이 바치고 신심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이들이 찾는 것은 인과응보에 따른 처벌과 보상에만 관심을 두기에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이용의 대상일 뿐이다. 이용 가치가 없으면 쓰레기처럼 버린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룬 업적과 공로에 따라 보상이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만 있을 뿐,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흐르게 하는 행동하는 자비가 없다.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은 인과 응보적 논리로는 알아듣기 어렵다, 자신을 스스로 내어주시는 무상성과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보편성은 인간의 업적이나 공로에 따른 보상이 아니다. 하느님은 신비다 신비는 영의 활동이기에 인간이 만든 인과 응보적인 틀에 넣어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인과 응보적 논리가 무너져 내린 곳에서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의 신비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관대하심은 오직 내어주시기만 하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는 분노가 자리할 곳이 없다. 하느님이 삼위일체인 이상 화를 내시는 하느님은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분노는 인간의 인과 응보적 논리를 하느님께 투사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비난해야 할 상황이 되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탓할 대상을 찾는다. 이러한 탓을 하느님께 돌려 분노하시는 하느님을 만들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하느님께 적용한 나머지 용서하시는 아버지를 잃어버렸다. (루가 15,11-32 잃었던 아들) 그러한 논리로 “죄를 묻지도 않고 잔치를 준비하시는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분노하시는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은, 통제를 위한 것이지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내세워 개인과 집단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내 탓을 네 탓으로, 우리 탓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린 역사가 인간의 역사다. 누군가에게 탓을 돌릴 때 단절의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는 하느님과 나, 너와 나, 피조물과 나 사이에 단절된 역사 안에서 살아왔으며 관계의 단절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 단절의 역사 안에서 원복(낙원)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결과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절의 역사를 회복의 역사로 바꾸시는 하느님이시다. (로마,5,1-21)
독점과 소유는 인간의 과도한 탐욕의 결과다. 독점과 소유는 신앙의 영역에까지 파고들어 관계를 어렵게 한다. 잘 지키고 더 많이 바치는 사람일수록 거룩하고 의롭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는 용서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꼭대기에 머물러 있기에 내려가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한다.
단절된 관계에 생명의 물줄기를 대주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흘러가게 하는 일만이 거룩하고 의로운 일이다. 지금 하는 일을 거룩하고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응답하는 신앙으로 바꿔야 한다. 과거에 받았고, 지금 받고 있으며 미래에도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 아래,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크고 감사해서 어떻게든 이를 하느님께 돌려드리기 위해 택하는 결단이기 때문이고,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통해 내어주는 몸이며 쏟는 피가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사랑하려는 의지보다 사랑받고 있음에 대한 확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필립 3, 8)
의로움의 차이를 극복하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믿음인가요?
선은 그 자체로 보상이며 악은 그 자체로 처벌입니다.
처벌하시는 하느님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바꾸는 믿음에 하느님 나라의 현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