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은
심판하지도 단죄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 것입니까?
무자비한 사람만 심판하고 단죄합니까?
그런 거라면 심판이란 무엇이고 단죄란 무엇입니까?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묵인해주는 것입니까?
자비로운 세상이 되기 위해 검사나 판사는 없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심판과 무자비한 심판이 있을 뿐이며
그래서 주님도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심판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과거 우리나라 역사에서 볼 때 올바른 심판을 해야 하는데
검사나 판사들이 독재자나 권력자의 눈치를 보느라
또는 그들의 편에 서 있어서 잘못된 심판을 많이 하였고
그래서 참으로 억울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죄를 지었는데도 죄가 없다고 판결한다면
그것은 피해자에게 자비롭지 않은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단죄하지 않음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 죄를 지으며 살게 하는 것이기에 죄인에게도 자비롭지 않은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죄인에게의 자비는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자비이고
그래서 죄인에게는 심판도 단죄도 다 자비입니다.
그러나 심판과 단죄가 전부이면 그것도 무자비입니다.
단죄를 하고 그것으로 끝이라면 무자비하다는 겁니다.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 돼!’하고 죽여 버리고 말면
그것은 사랑은 없고 단죄만 있는 것이기에 무자비한 겁니다.
미움과 분노의 단죄가 그런 것이 아닙니까?
누구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가득할 때
단죄할 거리를 찾거나 없는 죄도 만들어 단죄하고는
그를 어떤 식이로든 파괴하거나 심지어 죽여 버리려 들지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심판하고 단죄하는 그 무자비한 마음이 남한테만 그러할까요?
양식이 있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남에게 휘두르는 같은 칼로
자신을 먼저 베고 찌르는 법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남에게 퍼주는 그 됫박으로 그대로
받게 된다는 말씀도 이런 뜻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죄의식이 없고
남을 괴롭히며 희열을 느끼는 싸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남을 단죄하면 단죄받고,
찌르는 칼로 찔리는 법이지요.
같은 식으로 용서하면 용서받고
사랑하면 사랑받습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하면 많은 사랑을 받겠지요?
이것이 하느님의 공평하심이고 정의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