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얘기를 묵상하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건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천국에서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천국에 무조건 갈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진복 팔단의 가르침대로 살아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천국에서도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끝부분을 보면 부자가 천국에 가지 못한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말하지요.
자기처럼 자기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하는데 죽은 라자로가 가야 회개할 거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이 회개할 죄는 아니지요.
회개는 죄에서 회개하는 것이지 행복에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지요.
회개해야 할 죄는 이 세상 행복 때문에
하느님을 믿지도 갈망하지도 않은 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지도 갈망하지도 않은 이유는 오늘 예레미야의 말처럼
하느님보다 사람에게 의지하고 자기 힘과 돈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가 지옥에 있을 때처럼 이 세상에서
천국의 물 한 방울을 갈망했다면 지옥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사는 동안은 천국의 물을 갈망하지 않았고
천국의 물을 갈망하지 않은 이유는 이 세상사는 동안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며 만족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점이 회개해야 할 행복이고 죄스러운 행복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회개해야 할 그의 죄라면
다음으로 부자가 회개해야 할 죄는 라자로와의 관계입니다.
갈망하지 않은 죄가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 단절의 죄라면
사랑하지 않은 죄는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 단절의 죄입니다.
복음의 부자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부자 이기주의의 전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모두 이기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만
부자들의 이기주의는 오늘 복음의 부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 아는 뻔뻔스러운 이기주의입니다.
그가 지상에서 살 때는 라자로와는 전혀 아는체하지 않았고
그의 고통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완전한 단절의 삶을 살았습니다.
드나들 때마다 봤지만 보고도 못 본 체했을 것입니다.
보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못 본 체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아예 마음 밖으로 라자로를 밀어냈을 겁니다.
그런 그가 지옥에 있을 때는 너무도 뻔뻔스럽게 라자로를 끌어들입니다.
그를 시켜 물 한 방울이라도 축이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애원합니다.
그리고 라자로의 고통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눈이
여전히 사랑치 않은 자기 죄는 보지 못하고 자기 고통만 보고 봅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의도적으로 라자로에겐 이름을 붙여주고
부자에게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고 그저 부자라고만 합니다.
천국 명부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는 뜻일 텐데
나 김찬선이는 천국 명부에 이름이 있을 건가?!
나 김찬선은 오늘 복음의 그 부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