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에서
소작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입니다.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비유의 소작인들이 자신들임을 알아듣습니다.
그러고는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비유에서 자신들이 소작인이라면
예수님을 비유의 누구라고 알아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에 마지막에서
군중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다는
말이 나옵니다.
비유에서 종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역시
예수님을 비유의 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사가는
더 나아가 지금 그 비유를 듣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을 비유의 종이 아니라
아들로 알아듣습니다.
종과 아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보냈다는 것과
소작인들 손에 죽었다는 것에서는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유의 종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을 끝내지 않으시고
성경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무심코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예수를 죽이게 되지만
그 죽음은 모퉁이의 머릿돌 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죽음 역시 하느님을 위해 중요하지만
예수의 죽음은
여느 예언자들의 죽음과는 다를 것임을
성경의 인용을 통해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들었다면
예수가 비유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를
주인의 종이 아닌 주인의 아들로
죽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알아듣는 것은
믿음으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그것을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라
그들이 선뜻 행동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예수는 나에게 단순한 예언자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아들이신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언자들의 삶도 헛된 삶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예언자로 생각하는 것이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예언자가 아닌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다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