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
2023년 3월 29일 수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처한 조건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인내는 가르침이 깊이 뿌
리내렸을 때 가장 잘 샘솟습니다. 땅에 깊이 뿌리 박은 참나무를 뿌리 뽑아 버릴 수 있는 바람은 없듯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못 박힌 -뿌리내린 데서 더 나아가 못까지 박혀 있다면- 영혼은 파멸할 수 없습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신앙을 시험하고 싶어 하십니다. 신앙의 겉모습만 지니고 있지 않은지 알아보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더 충격적인 말로 그들의 영혼 깊이 파 들어가십니다 ...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믿지만 머무르지 못할 이들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굉장한 약속을 하십니다. 그들이 실로 당신의 제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한때는 믿었지만 머무를 수 없어 떠나간 이들에 대한 암묵적인 꾸짖음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34. 왕 예수
성서는 비유와 수난사화에서만 예수님을 왕이라 칭한다. 예수님은 최후심판에 대한 말씀에서 당신을 왕에 비유하신다. 이 왕은 양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때부터 너희를 위해 마련해 둔 나라를 상속받아라”(마태 25,34).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위쪽에 “죄목을 붙여 놓았는데 ‘이는 유다인들의 왕 예수’ 라고 적혀 있었다."(마태 27,37). 사람들은 그분을 왕이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유다인 왕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하려무나!"(루카 23,3). 왕이라는 칭호가 로마인에게는 예수님을 처형할 근거였고, 유다인에게는 예수님을 조롱할 이유였다. 로마인이건 유다인이건 자신들이 생각하는 왕과 예수님은 거리가 멀었다. 십자가는 그들이 생각하는 왕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왕이었다.(165)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4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27-28장 / 사도 1장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영성 주간>
생태 지향 :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2기 : 700 ∼ 1050년
제 2절: 교황권과 프랑크 왕국의 동맹
새로운 사명 앞에 선 프량크 왕국:
카를 대제와 서양 황제권의 창건
처음의 수십 년 동안 카를은 프랑크 왕국의 건설과 국경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카를의 교회적 • 종교적 지위가 교황권과 로마 교회와의 동맹으로 굳혀진 후 그는 더 강력하게 자신의 정복을, 동시에 종교와 교회의 이름으로 - 이제 그는 종교와 교회의 공인된 수호자였다 - 밀고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쟁 기도는 철두철미하게 왕국의 국경 주변을 압박하던 이교도와 미신자들에게로 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출정은 그가 스페인에서 무슬림과 싸우든 또는 왕국의 동부와 서부의 이교도들인 작센인, 아바르언, 슬라브인, 보헤미아인과 싸우든, 군사적 • 정치적인 성격과 같은 모양으로 교회적 • 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정치와 종교가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화가 정복과 결합되었고, 이민족들의 그리스도교화는 그들에게 프랑크 왕국의 통치권에 굴복함을 의미하였다.
카를은 진정한 책임감에서 행동하였고, 또한 자신의 정치세력의 확장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리스도교 미풍양속의 보급이 그의 관심사였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경우에 따라 어느 것이 더 중요하였는가는 물론 확인 할 수 없다. 그 문제제기 자체가 당시 모든 것을 규정하던 정치적인 종교심 앞에서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카를은 778년에 스패인에서 아라비아인들과 씨웠다. 탈환한 북스페인 지역을 지키기 위하여 그는 795년에 스페인 변경령을 설정하였다. 789년에 슬라브언을 향하여, 791년 . 795년 •797년에 아바르인올 향하여, 805 ∼ 806년에 보헤미아인을 향하여, 808∼811년에는 덴마크인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길었고 가장 격렬하였던 것은 작센 전쟁(772∼804) 이었다.
작센족의 정복은 프랑크족의 통일국가 창건을 위하여 사활이 걸린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교화가 정치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 보인 점은 선교에 불리하였다. 작센인의 국경 침입에 대한 응징 원정은 772년부터 격렬한 투기장으로 발전하였고, 804년 까지 오래 끌며 해마다 프랑크군의 새로운 원정을 작센으로 향하게 하였다. 777년에 카를은 작센 지방의 중심에 있는 파더보른에서 의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그는 모든 작센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믿으라고 지시하고, 그 지역을 선교 구역으로 분류하였다. 실제로 수많은 귀족 출신의 작센인들이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교가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곧 반격이 왔다.
카를이 스페인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비두킨트의 지휘로 대반란(782∼785)이 발생하였다. 반란군은 쥔텔 산에서 프랑크군의 한 부대를 기습하여 전멸시켰다. 카를은 즉시 그곳으로 가서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하였다. 그는 반란군들을 격파하고, 그중 4,500명을 알레르 강변의 베르덴에서 군대로 히여금 학살하게 하였다. 이 살육은 새로운 중오를 일으켰다. 덴마크로 도주하였던 비두킨트는 봉기를 선동하였으나 785년에 봉기가 실패하자 스스로 아티니에서 세례를 받았다.(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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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MAP(Ecology Meryem Ana Platform)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생태적 회심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