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 믿음의 아버지라고 믿는 아브라함이
주님께서 오실 때를 내다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기다렸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을 바로 눈앞에 두고 보면서도 정작 그 주님을 몰라본다는 주님 말씀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오늘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얘기하고,
계약을 맺는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첫마디를 떼십니다.
“나를 보아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이 실은 인간을 보지 말고 당신을 보라는 것이고,
인간 중에서도 나이 먹은 자기를 보지 말고 당신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보거나 특히 나이 먹은 자기를 보면
너에게서 많은 자손과 민족들이 나올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과 저는 하느님은 안 보고 자기를 보고,
그리고 자기를 보기에 아브라함처럼 멀리 내다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천 년 뒤의 주님 오심을 내다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는데
저는 주님을 보지 않고 내다봐야 고작 칠십 너머의 저를 보며 불안해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저만 보면 이 세상에서의 저밖에 볼 수 없는데
저는 이제 얼마 안 남았고, 그나마도 병들어 사람들에게 짐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 없이,
과거를 돌아보면 죄밖에 보이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면 불안합니다.
그러니 이제 생각을 바꿔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보고 영원을 봐야겠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원을 내다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 없이 자기 바라보기는
내성도 아니고 반성도 아닌 자폐일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자기 바라보기는
내성이요 반성이고 더 나아가 하느님 관상이요 자기 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