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3년 4월 2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고 도미니코 ofm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교회는 예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건을 기념하는 입당식과 장차 이루어질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수난 복음을 읽습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듣는 수난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수난과 죽음,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복음서마다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 하는 사건이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신앙인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 수난에 동참하도록 촉구하며,부활사건을 통하여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수난 복음의 전후 배경을 보면 성전 정화 등으로 인해 주님께서는 죽을 위기에 처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리사이 등의 음모와 유다의 배신,최후의 만찬,겟세마니에서의 기도,체포 되어 신문 받으심,조롱과 사형 선고,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시기까지 예수의 수난, 고통과 죽음,무덤에 묻히고 부활하시기까지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 줍니다.
이 성주간에 우리는 일상 안에서 주님의 수난의 의미를 더 깊이 묵상하며 구체적으로 일상 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는 수난은 무엇이며 어떻게 주님 수난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할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깊이 우리 마음에 다가와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그 분의 다섯 상처의 아픔을 깊이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고통 중에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며 다른 이들로부터 받게 되는 오해와 비난을 잘 참아 받게 됩니다.
주님 사랑을 외치며 천국을 갈망하는 신앙인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그분의 수난에 깊이 동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고통이 없는 기쁨과 위로를 구하기 이전에 일상 안에서 만나는 어려운 일들과 귀찮은 일들을 회피 하지 말고 감내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잔치와 축제를 찾기 이전에 주님을 위하여 일상 안에서 다가오는 고통과 모욕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때로 슬프고 부담스럽고 고달프고 씁쓸한 일이 생기면 특히 어떤 선한 것이 역겹게 보일 때면 지체말고 십자가 위에 계신 주님께로 달려가십시오. 자신의 뜻이나 세상의 충고나 육신의 충동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뜻이라 여기는 것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주저함 없이 수행할 때 우리는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확실히 이것은 온 영혼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의 수난을 일상 안에서 구체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깊이 깨달은 사람은 주님을 닮은 완덕의 생활로 다른 이에게 좋은 생활의 모범이되어 다른 이들을 감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선교요 복음화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거룩한 주간 되시길 빕니다.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4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장-6장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아낌 주간>
생태 지향 :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줄이기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프랑스 작가 샤또브리앙의 첫영성체
그러자 이번에는 제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는데도 그만 익숙해진 습관대로 ‘아닙니다, 신부님!’이란 말이 또다시 새어 나오고 말았어요. 그러자 고해신부님은 잠시 조용히 아무 말씀도 안하셨는데, 그것이 저에게는 마치 그분이 하늘 쪽을 쳐다보면서 도움을 간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너의 죄를 사하노라! “
제가 이 말을 듣고서 죄사함을 받기 위해 들어올린 신부님의 손을 보았을 때 저의 심장은 마치 번개붙이 떨어짐을 체험하는 것처럼 두근거렸습니다. 저의 온 몸은 갑자기 저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뜻밖의 의지력과 결의로 인해 몸이 떨려왔고 순간 저는 급히 다음과 같은 고백의 말로 선부님의 사죄경의 말씀을 막았습니다.
“신부님, 저는 아직 모든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읍니다.”
고해신부님께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 보시며 사랑으로 기다려셨던 이 말을 들으셨을 때 그분의 근엄한 표정이 바뀌었으며,
말할 수 없는 선하심과 부드러움이 그분의 얼굴을 밝게 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제게로 몸을 굽히시고는 속삭이셨읍니다.
“이보게, 두려워 말게. 와서 내게 모든 것을 말해보게!”
그래서 저는 스스로 거기에 대해 놀랄 정도의 그런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제 제 영혼을 압박하던 어떤 부담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커다란 기쁨이 제 마음 속에 스며들었읍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과 사랑을 언제나 저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읍니다. 저는 울면서 흐느꼈습니다.
그것은 참회의 눈물이었고 천국의 행복감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평생 처음으로 제 자신을 남자답고 정직하며 성실한 인간으로 느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고집스런 불순종의 벽을 처음으로 깨어버리고 아직 모든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한 후에는, 남아 있는 모든 사실을 고백하기란 아주 쉽고 간단했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의 대리자이신 신부님께서 자신의 손을 드시고는 저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 때 그분의 팔은 머리 위에서 움직이며 위협을 느끼게 하는 그런 팔이 아니라 저를 축복하고 포용해 주시는 아버지의 팔이었습니다.
그 때 탕자의 이야기가 제 마음 속에 떠올랐습니다. 제 자신은 참회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였고 고해신부님은 용서로 맞아주시는 아버지였습니다. 또한 그분은 성서의 비유 속에서의 아버지처럼 눈물을 흘리셨읍니다. …그런 후에 저는 고해석으로부터 일어났는데 그 곳에서 저의 어머니가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192)
----------------------------------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MAP(Ecology Meryem Ana Platform)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생태적 회심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