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예루살렘 입성 다음에 이야기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비교적 앞부분에서 다루지만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 생애의 절정 부분에
가까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은
성전 정화 사건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게 되는
직접적인 사건으로 언급합니다.
마태오복음은 성전 정화 사건에서
그러한 결정을 전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마태오복음은
대사제의 심문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두고 하신 말씀을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으로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님을 모독하기 위한 말로
사용됩니다.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의 말에
그렇게 반응했을까요?
성전이 유다인들에게 어떤 곳이기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을까요?
길고 긴 광야 체험을 하면서
그들이 그 고통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굳은 믿음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만남의 장막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들은
더 이상 만남의 장막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화려한 건물로 짓고 싶었습니다.
결국 성전을 짓게 되지만
유배 때 성전은 무너지고
다시 지은 것도 로마의 손에 무너지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미 유다 민족은
성전을 한 번 다시 지은 경험이 있습니다.
성전이 무너진 것은
유배의 결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무는 것을 언급하신 것은
유배를 떠오르게 하면서
유다 민족이 약해지는,
그래서 결국 없어지는 것을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민족 전체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전을 허무는 것을 말하는 사람을
없애야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전에 계십니다.
그러나 성전에만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이 태초부터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이 없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성전을 짓고 나서는
마치 하느님께서 성전 안에만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전이 없어진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고
그것은 민족의 정체성까지 흔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성전에만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은
살아계신 성전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그들의 눈을 가렸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결과를 가지고 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며 나아가고 있나요?
사람이 중심인지,
사랑이 중심인지
나를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