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오늘 심란하십니다.
그리고 심란하심을 드러내십니다.
당신 죽음 때문에 심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 때문일 것이고 배반 때문일 겁니다.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배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이 돌아가시게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계셨고 세 차례나 예고하셨던 바지만
당신 죽음에 제자들도 휩쓸려 배반하게 되어 심란하신 겁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배반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는데
제 생각에 그 차이는 적극적 배반과 소극적 배신의 차이입니다.
배반과 배신은 같으면서도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배반이 한편이었다가 다른 편이 되는 일반적인 의미라면
배신은 배반 중에서도 믿었던 사람이 배반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겼으니
적극적인 배반이고 주님의 죽음에 적극 가담한 것이긴 하지만
주님의 믿음을 기준으로 보면 베드로의 배신에 더 심란하셨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유다보다 베드로를 더 믿으셨다고 하면
베드로가 비록 주님의 죽음에 직접 또 적극 가담한 것이 아니더라도
당신 믿음이 배신당한 것이기에 더 마음 아프셨고 더 심란하셨을 겁니다.
‘믿었던 너마저!’라는 말이 딱 이 경우지요.
그래서 여기서 생각게 됩니다.
주님께 나는 베드로일까 유다일까?
나는 주님께서 유다처럼 당신 믿음에서 아예 제쳐놓은 자인가?
그래도 베드로처럼 믿을만한 놈이라고 쳐주시는 존재인가?
나는 주님께서 나를 믿어주신다고 믿는가,
믿음에서 나를 제쳐놓은 존재라고 믿는가?
당신 믿음에서 나를 제쳐놓았다면 저는 실망할 것이고
당신 사랑에서 배제된 것처럼 느껴져 불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수없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끝까지 믿어주실 것이고 다시 믿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다시 안 믿어주실 거라고 믿고,
주님 사랑에서 영원히 배제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아마도 유다처럼 절망하여 자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을 수없이 배신해도 주님은 나를 믿어주실 거라고,
베드로처럼 언젠가 당신께 돌아올 것을 믿어주실 거라고 믿어야 하고,
그런 믿음을 가진 자라야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