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악을 저지르는 자가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자기의 죄악이 다 드러나기에 나아가지 않고 숨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빛이란 빛이신 주님이고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빛이지만
죄를 지으면 영적인 의미뿐 아니라 실제로도 빛이 두려워 숨습니다.
어려서 제가 돈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남의 집에 갔을 때 방바닥에 동전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나 망설임 없이 그것을 가졌습니다. 돈을 훔친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 저는 그것이 도둑질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 어렸는데
집에 와서 그 돈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있자니
차츰 제가 나쁜 짓을 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집을 나가서 밤늦도록 밖에서 떨었습니다.
저의 첫 번째 죄의식이었고,
어린 제게는 밤이 무척 무서운데도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밤의 두려움보다 죄가 드러나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죄짓고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숨었는데
죄 드러나는 것의 두려움이 하느님의 두려움으로 바뀌었고,
죄를 숨기려던 것이 하느님과 단절케 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숨기려고 하지만 시편 139편에서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내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라고
다윗이 노래하듯 하느님은 다 아시는데 숨느라 하느님과 단절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노래하지만,
다윗도 처음에는 바세바와 간음한 사실을 숨기려고 그 남편을 죽인 사람이고,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그 사실을 드러나게 하시자
시편 51편에서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노래하고,
139편에서도 앞에서 본 것처럼 노래한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 인간은 죄를 숨기려다가 빛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숨고,
하느님과 단절되고 마는데, 오늘 저는 결이 좀 다른 차원에서
우리 삶을 성찰코자 합니다. 우리의 영성 생활 차원 말입니다.
저의 경우 프란치스코를 알면 알수록
제가 프란치스코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그래서 처음 한동안은 프란치스코를 닮으려 애를 쓰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프란치스코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함을 발견하고,
그리고 더 있어봤자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수도회를 떠난 적이 있지요.
그런데 저와 같이 수도회를 떠나지 않더라도 프란치스코를 알수록
자기의 한계를 보는 것이 괴로워 프란치스코에게 나아가기를 중단하고
차라리 다른 성인들 얘기를 강론이나 강의 때 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꼭 따라야 하지만 다른 성인은 꼭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우리의 공동생활에서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잘살고 있는 형제들 곧 빛이 되는 형제들도 있는데
그런 형제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부담스러워 편한 형제들과만 어울리거나
더 안 좋은 경우는 유유상종하며 공동체의 어두운 면만 뒷담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자신을 성찰합니다.
나는 빛으로 나아가는 존재인가?
나는 빛으로부터 숨는 존재인가?
오늘부터 한 주간 모 수녀회 피정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주간 강론은 수녀님들을 위한 강론입니다.
감안해서 들어주시고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