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북한 선교를 하며 그것을 후원하는 후원회 이름을 <한우리 후원회>라고
지은 것은,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과 우리는 ‘한 우리 안의 우리’라는 의미가 있는 이름이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한 민족의 우리라는 뜻도 있지만
주님의 한 우리 안에 같이 있는 우리라는 뜻이 더 중요한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도 잘 알아야 하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같아서 한 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다르지만, 그런데도 주님의 우리 안에 함께 있고,
주님의 한 우리 안에 있기에 같은 양 떼이고 하나라는 점입니다.
주님의 양 떼가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우리 안에 있을 것이고,
만약 도둑의 양 떼라면 도둑의 우리 안에 얼마간 있다가 팔려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도둑의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주님의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우리는 죽으러 팔려나가지 않고 푸른 풀밭으로 불려 나가는데
주님께서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데려나가신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도매가 아니라 소매입니다.
집단이 아니라 개인입니다.
하나하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이고,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놔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가시는 것처럼
하나하나 이름을 다 아시고 각별하게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 양들을 잘 아는 착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렇지요.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을 잘 알기에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우리가 뭘 필요로 하고 원하는지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분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인 우리 몫은 무엇입니까?
목자의 양들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목자가 자기 양들을 아는 것처럼 양들도 자기 목자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펭귄이나 괭이갈매기가 그 많은 새끼 중에서 자기 새끼를 알고,
그 많은 어미 중에서 자기 어미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앎은 대단한 사랑과 친밀감의 앎이기도 하지만
자기 목자를 모르고 도둑이나 삯꾼을 자기 목자로 알고
따라갔다가는 죽을 수도 있기에 친밀 이상의 생명의 앎입니다.
그런데 현대인 중의 많은 이가 어리석게도
주님이 아닌 사이비 교주를 자기 목자인 줄 알고 따라가거나
SNS로만 알 수 있을 뿐 잘 알지 못하는 인간을 마치 목자인 양 따릅니다.
이럴 때 모름은 어리석음이고 치명적입니다.
참 목자를 따르는 양 떼이어야 하는데 떼로 다니기는 하지만
그저 떼로 몰려다닐 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양들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목자를 안다는 것은 식별할 줄 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않게 되고,
천상 목자를 따라 주님의 영원한 우리 안에 안전하게 들게 될 겁니다.
그러니 양들이 목자를 아는 것은 의사와 돌팔이를 식별할 줄 아는 것,
그 이상으로 양들에게 참으로 중요하고 목자에 대한 사랑 못잖게
양들이 꼭 갖춰야 할 능력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