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4주 화요일-2013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오늘 유다인들은 안달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이미 말씀하셨고
당신이 하신 일이 당신의 정체를 증언하는데도
유다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고,
믿지 못함은 그들이 주님의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유다인들이 믿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함은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인격적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격적 신뢰 관계?
예, 목자와 양의 인격적 신뢰 관계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인격적 관계이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인격적 관계이어야만 믿을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인격적 관계가 아닌 이해관계일 경우
정말 순수하게 예수님을 알고픈 게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고 싶은 거고,
잇속으로 예수님을 견주어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빼먹을 것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이렇게 잇속에 따라 알려고 해서는
어떤 사람의 전모를 알 수 없고 진면목은 더욱 알 수 없으며,
예수님은 더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해관계는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런 바라봄은 전체를 사랑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의 어떤 것만을 노려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리고 바라는 것이 없을 때 보려고도 하지 않고
마치 필요 없다고 버리듯 아예 존재를 버려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인격적인 관계는 양과 목자의 관계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즉시 알아듣고 주님을 따릅니다.
사랑과 믿음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워싱턴 디시에 인접한 메릴랜드에서 살았는데
한 달에 한 번 뉴욕에 가서 강의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뉴욕에 가려면 필라델피아라는 곳을 지나야 하기에
그날도 필라델피아에서 새로운 사람을 태우고 출발하였는데
저 앞에서 한국말 하는 소리가 뒤에 있는 제제까지 들리는 거였습니다.
옆에서 하는 미국말은 들리지 않고
저 멀리에서 하는 한국말이 들리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오랫동안 듣지 못한 한국말,
먹고 싶은 한국 음식과 마찬가지로 듣고 싶었던 한국말이 들리니
옆에서 하는 수없는 말들을 가운데서도 한국말이 들리는 거였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소리를 즉시 알아들을 수 있고
사랑하는 이의 소리가 귀에 꽂히는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목소리를 즉시 알아채고
주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주님을 즉시 알아보는 것은
그러므로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인격적 사랑은 우리의 귀와 눈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보게 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님을 믿게 하고 따르게 합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주님의 알아 뵙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