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4주 토요일-2019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뵌 것으로 이미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뵌 것이라고
하시자 필립보는 뵙긴 무엇을 뵈었다느냐는 뜻에서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고
하면서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하겠다고 합니다.
필립보 사도뿐이 아니겠지만 주님 입장에서는 필립보가 답답하실 겁니다.
기껏 당신을 본 것이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했는데 뵙게 해달라니 말입니다.
그런데 답답하긴 필립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주님과 필립보 사이에서 누가 더 답답할지 모르겠습니다.
필립보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를 뵙지 못했는데도 이미 뵌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이미 뵙는데 왜 또 뵙게 해달라고 하냐고 야단맞을 때는
야속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을 겁니다.
사실 저는 주님 편이 아니고 필립보 편이고
필립보의 그 심정을 이해하고 다른 한 편으로
필립보의 그 뵙고 싶은 열망을 높이 사고
뵙는 것으로 충분하겠다는 그 말의 뜻을 십분 백분 공감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못 뵈어서 그렇지 뵙기만 하면
너무도 충분하고 다른 것은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는 것쯤은 저도 압니다.
제가 장가 안 것이나 살면서 늘 형제들이 불만인 것은
어떤 여자도 충분치 않고 어떤 형제도 충분치 않기 때문이지요.
충분할 만큼 만족을 주는 존재와 사랑이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받지 않기로 하였고 사랑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받는 사랑은 나를 만족케 할 수 없기에 하는 사랑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그래야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사랑인 거지요.
하느님이 이런 분이고 하느님의 사랑이 이렇다는 것을 필립보는 알고
그래서 하느님을 뵙기만 하면 충분하고 남을 거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저도 이것을 안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필립보처럼 저도 이것을 알기는 하지만
아직 이 하느님과 그 사랑을 만나 뵙지 못하여 답답할 따름이지요.
아무튼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 사람은
오늘 바오로 사도와 같이 성령과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고
그래서 인간과 인간의 어떠한 것에 좌우되지 않을 겁니다.
모욕을 줘도 모욕을 받지 않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모욕을 주는 사람을 피하고
그래서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인간의 사랑이나 칭송을 바라지 않고
그래서 미움이나 모욕도 받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나 칭송을 받으려는 사람이 미움과 모욕도 받는 것입니다.
사랑과 칭송을 받고 싶기에 미움과 모욕을 받을까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기에 그 두려운 미움과 모욕에 사로잡히고 마는 거지요.
그러나 하느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받아서 충만하고 함으로써 더 충만합니다.
이중으로 충만케 되는 것인데 이런 충만함 때문에
앞서봤듯이 미움이건 모욕이건 인간의 그 무엇도 범접치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뵙는 것으로 충분한 제가 되고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