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5주 월요일-2020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오늘 주님 말씀을 묵상하다가 '받아'라는 말에 눈이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저 '계명을 지키는 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라고 하시는데
주님 사랑과 계명 준수 사이에 어떤 단계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차치하고 받는 것조차 아예 거부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겁니다.
가끔 사고 싶지 않은 것을 사지 않아도 좋으니 한번 보시기라도 하라며
억지로 보내겠다고 하면 저는 아예 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받아서 보고 좋으면 사고 안 좋으면 안 살 것이 아닌,
결코 사고 싶지 않고 결국 사지 않을 것을 괜히 받았다가
돌려보내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도 지킬 생각이 아예 없으면 계명을 아예 받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아예 받지도 않는 사람은 주님을 조금도 사랑치 않는 사람일 겁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다른 백성들이 자기들의 신을 만들고는 그 신에게
경배하였는데 바로 그런 꼴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신명기 4장에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모세는 잡신이나 우상이 아니라 하느님같이 위대하신 분이
법 나부랭이가 아니라 진짜 위대한 법규를 다른 민족에게는 주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것은 대단한 영광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위대하신 분이 다른 사람에겐 주지 않고 내게만 주신다면 대단한 영광이고,
또 주신 것이 대단한 것이라면 더 대단한 영광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하느님을 위대한 분으로 생각지도 않고
법규도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니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차버리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주님도 사랑하는 것이고 계명도 고마운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계명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그만큼
주님을 사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받아놓기는 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만큼 덜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계명이라고 하면 어쩐지 거부감이 있습니다.
의무나 강제와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주님의 계명이 의무나 강제로
느껴지는 것인데 그렇기에 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주님 마음에 들고 싶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주님의 계명을 기꺼이 실천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계명도 초월할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계명을 주시지 않을 텐데
그것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계명을 주시기 전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먼저 알아서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알고서도 그 원하는 것을 스스로 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치 않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저는 사랑치 않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랑한다고 하기
어려운 저임을 성찰케 되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오늘입니다.
어제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제목만 올라가고 강론 내용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강론은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아무튼, 어제 강론 올리지 못한 것에 대해 양해 바라고,
앞으로도 예고 없이 강론 올리지 못하면
그런 이유 때문인 줄 아시고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