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을 대조하는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안식일의 새벽이 열리자마자 일찍 집을 나서 무덤까지 가고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데
제자들은 마리아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무덤까지 가고
가서는 빈 무덤만 발견하고 돌아와서 문을 닫아걸고는
저녁때까지 집 안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두려움, 갇힘, 보지 못함, 이것이 제자들의 상황이었습니다.
마치 지금 밖은 새싹이 돋아나고 꽃들이 활짝 피어나 생명이 꿈틀대는데
어두컴컴한 방안에 처박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한 발짝만 나가면 세상은 환하고 생명이 넘치는데,
아니 문을 열기만 해도 생명의 기운이 들어올 텐데 왜 문을 닫고 있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제자들이 유다인을 무서워하고 두려워 한 것처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무서워서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은 다 나를 해칠 사람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은 다 나에게 상처를 줄 사람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처를 받는 것이고
그가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의 방문을 침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설사 그가 상처를 준다 해도 내가 받지 않으면 되는데
나는 조그만 공격과 반대와 비판에도 상처를 받을 정도로 허약한 것입니다.
조그만 고통도 싫어하기에 조그만 고통으로도 전 존재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찻잔 속의 태풍이 바로 그것이지요.
바닷물은 바위가 떨어져도 곧 잠잠해지고 마는데
찻잔의 물은 작은 돌도 태풍이 됩니다.
그래서 작은 공격에도 완전히 평화가 깨어지고
이렇게 평화를 깨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용납하지 않는데도 쳐들어 들어오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 한 가운데로 들어와서
평화를 빌어주시고 용서를 하라고 하십니다.
침입이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있는데도 주님께서는 안으로 들어오시고
입을 딱 다물고 있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죽음을 이긴 생명이 안으로 들어가 두려움의 빗장을 제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아라,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죽여도 나의 생명은 살아나지 않았느냐?
겨울이 아무리 혹독해도 봄이 오면 물러가지 않느냐?
땅이 아무리 딴딴해도 새싹은 그것을 뚫고 올라오지 않느냐?
딴딴하다고 뚫고 나오지 못하는 것은 생명이 아니다.
그러니 나의 부활을 체험하고 생명을 받아들인 너희는 이제 빗장을 열어라.
이제 어떤 공격, 어떤 비판, 어떤 상처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들로 인해 너의 평화가 깨지지 마라.
그것들을 다 용납하여라. 그러면 다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할 수 없음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제 다 용납하면 용서 못할 일도 없고 아예 용서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빗장을 열고 밖으로 나가라.
내가 너희에게 했던 것처럼 평화를 선포하고
그들이 저지른 죄를 나대신 용서하여라.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이런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이제 빗장을 열고 세상에 나가 담대하게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선사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죽은 자처럼 지냈던 그들이 이제는 생명을 담대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병자들은 행여 그 그림자만이라도 스쳐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을 정도입니다.
기가 강한 사람은 주변에 기를 뻗쳐 낫게 하기 마련인데
옷깃만 만진 여인에게도 치유의 기를 뻗치신 주님처럼
이제 제자들도 그림자만 스쳐도 나을 정도로 치유의 기를 뻗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기를 내뻗치기 전에 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면 안 되고 기가 통하도록 기문氣門을 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가 내 안으로 들어오고, 다시 나를 통해 나갈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토마처럼 불신해서는 안 되고
주님 부활을 믿어야 하고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