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이 당신을 볼 수 없게 돼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당신을 볼 수 있게 돼
제자들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기쁨으로 바뀌는 근심에 관해 성찰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모든 근심이 다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되치기를 잘하여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지만
어떤 사람은 외부 상황에 의해 자기의 근심과 기쁨이 좌우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새옹지마의 얘기는 우리 인생을 깊이 생각게 하지요.
중국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오랑캐 땅으로 도망치고 이에 이웃이 위로의 말을 전하자
노인은 "이 일이 좋은 일이 될지 누가 알겠소"라며 태연하게 말합니다.
과연 며칠 후, 노인의 도망쳤던 말이 암말 한 필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웃들이 노인에게 축하의 말을 하자 노인은 담담하게
"이게 화가 될지 누가 알겠소"라고 말했는데 그 말대로 노인의 아들이
오랑캐 땅에서 온 말을 길들이다가 낙마하여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맙니다.
이에 이웃들이 노인을 위로했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담담하게
"이 일이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라고 말하고, 과연 노인의 말대로
몇 년이 지나 전쟁이 났을 때 다른 집 아들들은 전쟁에 나가 다 죽었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친 다리 때문에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땅을 치며 애통할 일도 있고 기뻐 춤출 일도 있으며,
이에 따라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이 출렁일 수도 있고
이 노인처럼 길흉화복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근심과 기쁨의 관계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의 근심과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슬퍼할 일도 많고 기뻐할 일도 많지만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일도 주님 때문이고,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일도 주님 때문이어야 한다고 오늘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근심과 기쁨이고,
동양의 행불행과 다른 그리스도교의 행불행입니다.
조금 있으면 주님이 안 계시기에 우리는 근심하고,
조금 더 있어 주님께서 다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기뻐하게 되는,
그런 인생이어야 하고, 그런 신앙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른 것들로 인해서는
우리 인생이 출렁거리지도 않고 일희일비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이 안 계신 것이 근심거리고,
주님이 함께 계시면 온갖 근심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기쁨은 온갖 출렁거림을 막아
잔잔해지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묵직한 바위와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희로애락에 까불리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게 하시는 기쁨의 바위라고 다시금 고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